[작가 한상복의 남자이야기]<11>아버지의 자리는 사라졌지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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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봉투가 사라진 게 비극의 시작이었어. 은행에서 돈을 찾아 쓰면서 고마움을 느끼겠어? 그때부터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진 거라고.”

회사 창립기념식에서 OB 선배가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남자는 선배의 말에 공감하지 못한다. 월급봉투로 건넨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가족을 위한 노동의 결실이 존중을 받지 못하는 세상인데.

옛날에는 안 그랬던 것 같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부재중이었지만, 집 안에는 아버지의 자리가 있었다. 세월이 흘렀고, 아버지가 된 남자는 집 안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안방은 아내 차지, 건넌방은 아이 차지, 서재는 아내의 옷 차지, 소파는 강아지 차지다.

남자는 아버지 역할이 어떤 것인지 배워본 적이 없다. 주말에나 집에 계시던 아버지가 한 대로 부전자전, 아내와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자기 고집만 피웠던 잘못을 대물림한 것 같기도 하다.

TV에 나오는 ‘친구 같은 아빠’를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요즘은 아이와 어쩌다가 마주치는 정도다. 때로는 버릇없게 구는 아이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보려다가, 아내의 “학원 늦겠어!” 고함에 화들짝 놀라 포기한다.

남자는 여전히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선 회의적이기도 하다.

다른 남편 또는 아빠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여유도 넘쳐서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는 그게 기본인 ‘○○ 아빠’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주변에만 한 명도 없다.

원래 가족은 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은 물론이고 양보와 배려로 이뤄진 공동체였다.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집단단위이자, 구성원들의 꿈과 행복의 출발점이면서 귀결점이기도 했다. 그랬던 가족의 모습을 앞으로는 역사 기록에서나 찾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경쟁력 지상주의는 마침내 가족마저 ‘성공을 위한 전초기지’로 재구성해 버렸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성공을 위해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아빠는 직장에서, 엄마는 아줌마들 틈에서, 아이는 학교에서 경쟁자들보다 앞서기 위해.

남자는 어릴 때 추억을 떠올린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시절, 아버지의 무동을 탔을 때가 생각난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넓은 세상. 아버지라는 의미가 원래 그런 것 아닐까. 가족에게 양 어깨를 내주어 더 나은 세상을 보게 하는 존재.

남자는 결심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무동을 태워주는 역할’을 맡기로. 잘난 아빠들이 많아서 까치발 연습이 필요할 것 같지만.

한상복 작가
#작가 한상복의 남자 이야기#아버지#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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