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영호]파이시티 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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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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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주간동아팀장
윤영호 주간동아팀장
파이시티(서울 양재동 복합물류센터) 인허가 과정에서 일그러진 일부 권력 실세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인사를 주무른 것도 모자라 뒤로는 검은돈까지 챙겼으니 참담할 뿐이다. 경제를 살리라고 찍어줬더니 측근들의 배만 불린 꼴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부터 대체 뭘 했는지 묻고 싶다. 이들이 설칠 때 이미 국민은 5년마다 되풀이되는 임기 말 막장 드라마의 종말을 다 알고 있었는데 대통령만 몰랐다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무너지는 ‘탐욕의 바벨탑’ 아래서 거듭 확인하게 되는 우리 은행들의 후진성도 개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의 도덕 불감증은 여전했다. 이정배 전 파이시티 대표가 이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은행이 2003년 말 1350억 원의 지급보증을 서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우리은행 직원은 이 전 대표로부터 수십억 원의 뒷돈을 받았다. 국민의 혈세인 공적자금을 투입한 은행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도 경영진 중 누구 하나 책임을 졌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은행의 대출 심사능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이 좋아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지 실제로는 부동산 담보 대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PF란 해당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평가할 역량이 가장 중요한 선결 요건인데 우리 은행들은 하나같이 이를 갖추지 못했다. 2008년 6월 기준 1845억 원의 PF 대출을 해준 우리은행이나 1178억 원을 대출해준 농협이 모두 그러했다. 심지어 일반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각각 3800억 원과 1400억 원을 투자한 두 개의 공모 펀드 운용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처럼 후진적이고 부패한 토양 위에서 이 전 대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으로 이 사업을 밀어붙였다. 은행과 펀드는 “땅 매입 자금을 빌려 주겠다”고 나섰고, 건설회사는 “공사만 맡겨주면 지급보증을 서 주겠다”고 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믿는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파이시티 사업은 마지막 남은 서울 강남의 요지 화물터미널 터에 국내 최대의 물류·유통센터를 세우는 것이었으니 그 믿음은 더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사실상 끝장을 고했다. 인허가가 쉽게 나지 않은데다, 부동산경기 침체마저 겹쳐 공사 착공도 못한 상태에서 늘어나는 금융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급기야 우리은행 등 채권단은 2010년 8월 법원에 파이시티 파산신청을 했고, 법원은 지난해 말 법정관리 결정을 내렸다.

파이시티가 화물터미널 터를 모두 매입한 것은 2006년으로 공교롭게도 은행의 가계대출이 급증하면서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값이 폭등하던 때였다. 당시 은행들은 너나없이 아파트 등을 담보로 대출을 늘리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따라서 파이시티 사건은 당시 은행끼리의 치열한 외형경쟁의 폐해가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드러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의 또 다른 교훈은 금융기관 리스크는 불황 때보다 오히려 경기가 좋을 때 더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는 철칙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는 점일 것이다. 금융 감독 당국은 이제라도 우리 은행들의 리스크 관리에 허점은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볼 일이다. 은행이 돈을 함부로 풀 때 권력형 비리의 독버섯도 함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파이시티 스캔들은 보여준다.

윤영호 주간동아팀장 yyoungho@donga.com
#파이시티#후진성#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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