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현진]미국이 직면한 ‘학자금 대출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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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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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뉴욕 특파원
박현진 뉴욕 특파원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대들이 미국 내 빈부 격차 등을 화두로 수개월간 점거시위를 이어갔던 미국 뉴욕 맨해튼. 25일 이곳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시위가 벌어졌다. 수백 명의 대학생이 미국의 학자금 대출 잔액이 1조 달러(약 1140조 원)를 돌파한 것을 계기로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한 것.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월가 시위대들이 활동 재개를 예고한 가운데 학자금 대출을 향한 대학생들의 분노가 어떤 상승작용을 일으켜 11월 대선에 영향을 미칠지 미 언론들은 관심을 쏟고 있다.

문득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어떤 심정으로 이날 시위를 바라보았을지 궁금했다. 버냉키 의장은 2월 28일 미 의회 증언에서 흥미로운 사적(私的)인 발언을 했다. 소위 미국 내 1%에 속하는 그이지만 이날 “의대를 다니는 아들의 학년이 높아지면서 40만 달러(약 4억6000만 원)의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학생들의 학자금 대출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것에 대해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학자금 대출이 중산층뿐 아니라 상위층까지 포함한 미 국민 전체의 문제임을 시사한 것이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미 인구의 15.4%인 3700만여 명이 학자금 빚을 갖고 있다.

학자금 대출은 부동산담보 대출과 신용카드 대출에 이어 미국 사회의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미 2010년에 신용카드 대출(지난해 말 기준 7961억 달러) 잔액을 넘어섰다. 미 경제가 호황이어서 졸업생들이 취업 후 대출 원리금을 꼬박꼬박 갚아 나갈 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미 졸업생의 절반 이상이 백수인 상황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대출금을 갚을 길 없는 ‘빚쟁이’로 젊은이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있다. 미 대학생 한 명당 대출 금액은 평균 2만5000달러(약 2800만 원)이며 로스쿨 등 학비가 비싸 대출액이 큰 대출 잔액 상위 1%는 무려 평균 15만 달러(약 1억7000만 원)에 이른다.

학자금 대출의 부담은 여러 경로로 미 국민의 삶을 궁핍하게 하고 있다. 지난달 만난 뉴욕대 졸업생은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 전에 가장 먼저 살피는 게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한국 기준으로 “직업이나 부모의 경제력 아니냐”고 되물었더니 틀렸단다. 상대방의 학자금 대출 규모를 먼저 파악한다는 것이다. 미 젊은이들이 짊어진 빚의 부담을 새삼 느끼게 한 대화였다.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한 1980년대 정부 보증 학자금대출을 크게 확대했던 미 정부도 요즘 곤혹스럽다. 연체율이 10%를 넘어서면서 고스란히 정부 재정에서 갚아야 할 학자금 연체금액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금리를 올해 6월 말 시한으로 절반(3.4%)으로 낮췄던 미 정부와 의회는 이를 원상 복귀해야 하는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학자금 대출을 벤치마킹해 2005년부터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지만 지난해 말 누적으로 73만여 명에게 2조8614억 원의 학자금 대출이 집행됐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학자금 대출이 급증하는 반면에 취업률이 낮아져 대출금 상환이 연체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미국을 바라보고 이 제도를 도입한 한국 정부는 현재의 미 사회가 직면한 학자금 대출의 덫을 직시해야 할 것 같다. 머지않은 시기에 한국의 젊은층은 물론이고 그 부모들에게 비슷한 그늘이 드리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젊은이들의 결혼 제1조건이 ‘학자금 대출 규모’가 되지 않기 위해선 말이다.

박현진 뉴욕 특파원 witness@donga.com
#학자금#월가#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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