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하태원]원탁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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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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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圓卓)은 6세기 영국의 전설적인 군주 아서왕 시기에 등장했다. 바위에 꽂힌 명검(名劍) ‘엑스칼리버’를 뽑아 캐멀롯 왕국을 태평성대로 이끌었고 결국 영국을 통합한 아서왕은 지방 토호세력인 기사(騎士) 150여 명을 상하 구별 없이 원탁에 앉게 해 회의를 가졌다. 이름 하여 ‘원탁의 기사’다. 원탁은 충돌하는 이익에 대한 평등한 조정의 상징물처럼 여겨졌고 아서왕은 영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근현대사에서 유명한 원탁회의 중 하나는 1930∼1932년 식민지 인도의 자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과 인도 간 열렸던 세 차례 회의다. 비폭력·불복종 운동의 기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과의 원탁회의에 참여했지만 대부분의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거부했고 결국 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동유럽권 몰락 당시 폴란드 자유노조연대를 이끈 레흐 바웬사는 1989년 당·정부·노조·지식인대표 등 55인 원탁회의를 조직해 동유럽 사회주의권 사상 첫 비공산당 주도의 연정(聯政) 출범을 이뤄냈다.

▷2007년 제21차 회의를 끝으로 5년째 열리지 않고 있는 남북 장관급회담에도 한때 원탁이 나온다. 2005년 6월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남북회담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제안했고, 김 위원장은 “초반에 5분 동안 날씨이야기, 모내기 이야기를 한 뒤 (본회담에서) 주먹질하고 말씨름하는 소모전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호응했다. 그 결과 등장한 남북한 원탁회의는 그해 두 차례 회의 뒤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고 남북회담 문화도 개선되지 않았다.

▷국내 진보 세력도 원탁회의를 종종 만들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패색이 짙던 당시 ‘시민사회’는 원탁회의를 만들어 후보 단일화를 논의했고, 대선 패배 이후에는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 구성을 위한 원탁회의가 구성됐다. 지난해 7월 ‘진보 원로’를 자칭하는 21명이 구성한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의 ‘훈수 정치’도 점입가경이다. 이른바 ‘2013년 체제’ 주창자인 백낙청 씨는 한 인터뷰에서 “행동으로 압박하지 않으면 존재감이 없다. ‘좋은 말씀’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대선에 대한 노골적 개입 선언이자 정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월권(越權)하겠다는 다짐이 아니길 바란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횡설수설#하태원#원탁회의#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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