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화동]정부 R&D‘성실실패制’ 도입… 모럴 해저드 경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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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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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동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상임위원
김화동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상임위원
비아그라로 유명한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의 2010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은 10조 원이 넘는다. 우리나라 정부 R&D 예산의 70%에 육박하는 규모다. 코네티컷 주에 있는 그로턴연구실은 4000명 이상이 근무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신약 개발시설이다. 그런 화이자의 R&D 실패율은 96%다. 성공률이 4%라는 얘기다. 신약 개발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물론 연매출액 19억 달러의 비아그라에서 보듯 성공하면 효과는 엄청나다.

단순 직접 비교는 무리지만 우리 정부의 R&D 성공률은 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다. 지식경제부와 중소기업청이 지원하는 R&D 과제의 성공률은 98%에 이른다. 2008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조사한 부품소재 기술개발사업에 있어 기술개발 성공률은 78.6%, 사업화 성공률은 62.5%로 나타났다.

이처럼 성공률이 높은 주된 원인은 손쉬운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신청자는 실패하면 다음번 연구비 확보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애초부터 안전한 과제를 기획하고, 지원 기관은 성공 확률이 높은 과제 위주로 선정해 왔다. 기술개발이 사실상 완료된 상태에서 연구비를 신청한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R&D의 진정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원천기술로 인정받거나 대규모 시장을 창출한 사례는 극소수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 달성하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낮게 잡아 달성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위한 선진국 추격형 연구개발 정책을 펴왔으나 이제는 창조형 연구개발정책으로 전환할 시점이다. R&D 과제도 성공이 보장된 안전한 과제가 아니라 모험적인 과제에 도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연구자 개인이나 기업, 지원 기관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정책적 제도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안전지대에 머물러서는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정부 R&D에 ‘성실실패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제도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도전적 모험적 연구과제에 대해서는 설혹 실패로 끝날지라도 연구자의 성실성이 인정되면 연구 참여 제한, 연구비 환수 등 제재 조치를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패란 어떤 연유로 연구과제의 목적을 달성치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일부 부처에서 시범 실시해 오던 성실실패를 확대 적용키로 하고 관련 규정을 개정하고 있다.

정부 R&D의 2.5배를 투입하고 있는 민간기업에서도 안전한 연구 수행 태도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연구과제 대부분이 성공하는 연구는 진정한 연구로 보기 힘들다.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문화를 조성해 실패한 연구를 통해 한 단계 점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신기술 개발 공모로 선정된 과제에 대해서는 기술개발에 실패하더라도 돈을 지원받은 중소기업에 불이익을 주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어떤 제도든 양면성이 있는 법이다. 성실실패를 어떻게 판정하느냐에 따라 좋은 취지는 퇴색하고 오히려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우려도 있다. 연구과제의 기술 수준과 창의성, 연구노트를 통해 본 연구활동의 충실도, 연구 결과의 파급효과 등이 판정기준이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연구자의 건전한 양식이지만 불성실이 성실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구체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성실실패제도는 비단 과학기술 분야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어느 분야에서건 성실한 과정을 거친 정당한 실패에 대해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정부 R&D에서의 성실실패제도 도입이 다른 분야에도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화동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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