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축구공은 둥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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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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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국제부 기자
정양환 국제부 기자
그곳은 화약 냄새에 익숙한 땅이었다.

이스라엘 북부, 키리아트 슈모나. 레바논 국경과 3km 남짓 떨어진 도시다. 이스라엘이 아랍 진영과 다툴 때마다 포격과 총성이 지축을 흔들었다. 1974년 어린이 18명이 미사일 요격에 숨진 이래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 주민에게 전쟁은 ‘일상’이었다.

사정이 그러니 도시는 메말라갔다. 농사 말곤 별 산업기반도 없고, 그 흔한 영화관도 없다. 2만 명 남짓의 주민들 얼굴엔 우울만 가득했다. 젊은이들의 소원은 언제나 ‘탈출’. 이곳에서 애향심이란 떠난 자들이나 느끼는 사치였다.

하지만 최근 키리아트 슈모나는 바뀌고 있다. 시민들의 눈빛부터 달라졌다. 길가에서 환호와 노래가 들려온다. 사실 생활수준은 별반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도시가 생기를 되찾은 이유. 바로 ‘축구’ 덕분이었다.

사실 이 지역 연고 프로축구팀 ‘하포엘 이로니’는 과거 도시만큼 엉망이었다. 5부 리그까지 있는 이스라엘에서 4부와 5부 하위권을 전전했다. 이스라엘 1부 리그는커녕 3부 리그에 나가보는 게 소원이었다. 조기축구회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느 드라마가 그렇듯 ‘키다리 아저씨’가 등장했다. 이름은 이지 셰라츠키. 어린 시절 도시를 떠났던 그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거부가 된 셰라츠키는 언제나 그늘이 드리운 고향을 구하고 싶었다. 이곳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리라. 어린이병원을 지을까, 아님 학교를 세울까. 이내 셰라츠키는 이 도시에 진짜 필요한 걸 깨달았다. “그것은 ‘긍지’였습니다. 스스로 삶의 터전에 자부심을 갖지 않는 한 이곳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1999년 백만장자는 동네 축구팀을 인수했다.

그 뒤 이 스포츠클럽은 기적을 써내려갔다. 차례로 상위 리그로 승격하더니 올해는 1부 리그에서도 수위를 달리고 있다. 이대로 우승하면 내년엔 꿈의 무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뛰게 된다. FC 바르셀로나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맞붙을 수도 있단 소리다.

이들의 성공담에선 놓쳐선 안 될 키워드가 있다. ‘인내’와 ‘공평’이다. 먼저 그들은 서두르지도, 요행을 바라지도 않았다. 몸값 높은 선수를 영입하는 대신 유소년 축구교실에 투자했다. 눈앞의 성과보단 미래를 선택했다. 10년 넘게 걸려 지역 출신 선수들을 키워냈다. 현지신문 예루살렘포스트는 “하포엘 이로니의 최고 슈퍼스타는 오랜 시간 빚어낸 팀워크”라고 평했다.

더 중요한 건 ‘공은 둥글다’는 축구의 진리를 실천했다는 점이다. 이곳 태생 이슬람 선수가 6명이나 뛰고 있는 게 증거다. 이스라엘 축구계에서 이교도 기용은 금기시되는 게 현실. 그러나 그들은 실력만으로 선수를 공정하게 평가했다. 요시 에드리 단장은 이를 ‘신뢰의 시너지’라 표현했다.

“선수들은 자신들의 출전에 어떤 편견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믿습니다. 팀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이가 경기장에 나선다는 걸 안다는 얘기죠. 필드엔 인종도 정치색도 필요 없습니다. 함께 뛰는 11명의 동료가 있을 뿐이죠.”

지난해 이후 이스라엘은 상당히 불안하다. 주택시장 붕괴로 중산층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한 극우 종교단체인은 종아리를 드러냈다고 여덟 살 여자애에게 침을 뱉었다. 그런데 정부는 최근 이란을 상대로 전쟁 채비에 여념이 없다.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미국의 외교적 해결 요구에도 올봄 단독공습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곳 정치인들도 키리아트 슈모나 축구클럽을 보고 깨닫는 게 있으면 좋겠다. 진정 국민이 원하는 게 뭔지.

정양환 국제부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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