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구종]김근태, 박종철, 그리고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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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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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네이버 검색의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김근태’를 치면 1985년 그가 경찰의 고문과 용공조작 끝에 구속당해 법원의 유죄판결을 받고 1988년 6월 가석방되기까지 3년 동안 모두 181건의 동아일보 기사가 뜬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씨 보안법적용 기소’ ‘김근태 고문, 증거보전 이유 없다 기각’ ‘구속 김근태 접견차입금지령’ ‘고문혐의 경찰 등 13명 증거없다 무혐의 결정’ ‘케네디 인권상 김근태씨 부인 한국서 출국불허’…. 기사의 제목만 훑어봐도 “핏줄이 터지고 신경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의연히 저항했던 투쟁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져간 ‘박종철군 고문치사’ 관련 동아일보 기사도 수백 건에 이른다.

‘6·10민주항쟁’의 함성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실현하고 88올림픽으로 한국의 이미지가 새로워지기 이전, 이 땅의 1980년대는 정치적 반대세력과 양심수들에게는 공포와 암흑의 세월이었다. 그런 암울한 시대에 경찰의 전기고문에 맞섰던 김근태, 물고문 끝에 스러져간 박종철은 이 땅의 민주화를 열어젖힌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당시 공안당국은 “김근태는 빨갱이”라며 말도 못 꺼내게 했고, 박종철에 대하여는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동아일보는 엄혹했던 시대상황을 뚫고 비록 한 줄이라도 김근태의 고문투쟁과 공안당국의 인권유린을 보도해 김근태의 투쟁이 한 사람만의 투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노력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특별취재반을 만들어 2년여에 걸친 추적보도 끝에 박 군에게 가해진 물고문의 진상과 경찰의 은폐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국가범죄로서의 고문을 추방하자는 캠페인을 벌여 고문기술자들의 구속, 남영동 대공분실 해체를 이끌어냈다. 동아일보는 6월 민주화의 새벽을 여는 파수꾼의 역할을 자임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일각에서 당시 언론이 고문의 실상을 보도하지 않았다거나 침묵했다고 폄훼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필자가 김 고문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자유의 몸이 돼 정치 일선에 나선 지도 한참 후인 1997년, 정치인 언론인 문화인들이 교류하는 조촐한 모임에서였다. 김 고문은 “동아일보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김근태도 없었을 겁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비록 짧지만 진심이 담긴, 동아일보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그 김근태 상임고문이 아깝게도 작년 말 세상을 달리한 지 30일로 한 달이 됐고, 14일에는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25주기 추도식이 그가 희생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렸다. 오늘날의 정치적 자유는 김대중, 김영삼 두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지도자, 김근태 박종철처럼 목숨을 걸고 투쟁한 많은 민주투사들의 희생 위에서 이뤄졌다.

민주화 인사들의 투쟁과 희생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오늘의 정치권이다. 김근태 고문, 그리고 박종철 군처럼 민주화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오늘의 정치권을 본다면 그들이 추구해온 밝은 세상, 맑은 정치의 염원이 이런 것이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만 같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2년 한국의 정치는 벌써부터 과열상태다.

오늘날 우리 정치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지만 그 어느 쪽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눈물과 피로 쟁취해낸 이들의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근태’와 ‘박종철’의 원점에 서서 참신하고 새로운 정치 풍토를 이루어야 할 책임은 바로 오늘의 정치인들에게 있다.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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