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승호]FTA 영양제와 배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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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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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의류업체 베가텍스타일은 작년 대구의 중소업체 대창무역으로부터 폴리에스테르 니트 원단 12만 달러어치를 구매했다. 재작년 구매액 5만3000달러의 2배가 조금 넘는 액수다. 베가가 구매량을 늘린 것은 종전 10%였던 원단 관세가 작년 7월 한-EU(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의 발효로 폐지됐기 때문. 원단값이 싸지면서 베가 역시 가격경쟁력이 생기고 판로가 확대된 것이다. 대창무역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하는 박천호 과장은 “베가 측에서 올해 주문량을 작년의 2배 수준으로 다시 늘리려는 움직임”이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작년 7∼11월 EU에 대한 한국의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5.1% 줄었다. 재정위기로 유럽경제가 얼어붙었기 때문. 특히 경기 변화에 민감한 선박, 반도체, 휴대전화의 타격이 컸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한-EU FTA 수혜업종’이라는 자동차 석유제품 건전지의 수출은 크게 증가했다. 수출기업에 대한 KOTRA의 설문조사 결과는 더 분명하다. 79%가 ‘FTA가 비즈니스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으며 68%가 ‘관세철폐 덕분’이라고 답했다. FTA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교역 현장에서는 효과를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고급 자동차, 반도체 제조장비 등은 EU로부터의 수입이 많이 늘었다. 명품 핸드백 수입은 70%나 증가했다. 이처럼 FTA는 한국의 수출만 늘려주는 게 아니라 상대로부터의 수입도 확대시킨다. FTA를 통해 한국만 재미를 본다면 바보들이 아닌 이상 아무도 한국과 FTA를 맺지 않을 것이다. 관세 또는 비관세 장벽 때문에 교역되지 않던 품목이 활발히 거래되도록 하는 것이 FTA가 노리는 원래 목표다.

▷통상이 확대되면 국제분업이 고도화돼 국민경제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결국 시민의 소득과 삶의 질이 향상된다. 하지만 비교우위를 확보한 산업이 큰 혜택을 누리는 대신 비교열위(劣位) 산업은 위축되는 것이 교역의 본질이다. ‘경쟁과 개방의 정책’인 FTA만으로는 ‘분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FTA로 키운 파이를 잘 나누려면 별도의 정책조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FTA를 마치 나쁜 것인 양 몰아붙일 일은 아니다. 배탈 치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영양제를 독약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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