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송우혜]어리석은 질문도 세상을 진보케 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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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어떤 사람이 지도자로 사회의 발전과 행복에 공헌하고 그 이름이 큰 글자로 역사에 남는가. 인류의 스승으로 불리는 분들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우선 살아있는 인간미를 갖추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더 완벽하게 완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들의 사상을 후세에 전한 뛰어난 제자들을 두었다. 뛰어난 지도자들은 여러 장점이 쌓여서 그 총화로서 그런 인물이 된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장점 중에서 특히 ‘자신의 말에 남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그들이 갖고 있었던 자세를 생각해 보겠다.

이 문제는 공자를 볼 때 매우 선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직접 명확하게 언급해놓은 발언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우수했던 안회(顔回)는 실천력이 대단했지만 이해력도 어찌나 뛰어났는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以知十)’고 일컬어진 인재였다. 공자조차 그런 면에서는 자신이 안회만 못하다고 분명하게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자는 그런 안회를 두고 “안회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다. 내가 하는 말에 기꺼워하지 않음이 없다(回也非助我者也 於吾言無所不說)”고 토로했다.

反問과 비판을 높이 평가한 공자

공자의 ‘공자됨’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그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단련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더 완전한 것으로 향상시키고자 했던 신실한 노력과 의식의 핵심이 바로 그 구절에 담겨 있다. 자신이 하는 말마다 즉각 알아듣고 그 말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기꺼워하는 뛰어난 제자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웬만한 스승들은 그런 제자가 있다는 것에 크게 기뻐하면서 그렇지 못한 못난 제자들을 답답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지 않았다. 스승인 자신과 뛰어난 제자 사이에 형성된 관계가 지닌 매우 중요한 한계와 약점을 명확하게 알아본 것이다.

자신의 말을 모두 잘 알아듣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제자를 상대로는 그 말을 하는 선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한 제자들은 질문이나 반문(反問)을 하거나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공자로 하여금 보충 설명을 하거나 부연 설명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공자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생각의 범위나 사상의 틀이 더 견고해지고 보다 넓고 크게 확장되고 선명해지며 명확해지는 것과 자신의 미흡한 점이나 오류를 확인하고 시정할 수 있음을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들어서 질문이나 반문이 전혀 없이 전적인 지지와 찬사를 보내는 뛰어난 제자보다는, 하나를 듣고 그 하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못난 질문이나 반문을 내놓는 어리석은 제자가 자신의 사상을 더 넓고 크고 강력하게 발전시켜 나아가는 데 진정한 도움이 되는 존재임을 선명하게 인식한 것이다.

예수 역시 말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청중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성경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고까지 묘사돼 있다. 들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은 말하는 분이 구사하는 표현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든 또 하나의 예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치는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면에 그대로 적용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 간의 소통 문제’에 대입해 보면 실상이 더 선연하게 드러난다. 국민의 반대가 많은 정책의 경우 우선 이명박 대통령부터 지금은 국민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한 일의 정당성과 필연성이 입증되리라는 소신이 강해서 ‘소통 부족’에 대한 아쉬움이 별로 없는 듯하다. 다른 여야 정치인 역시 대개 마찬가지다.

어리석음 깨우치려고 비유 발달

그러나 생각의 방향을 바꿔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생일에 잘 먹자고 열흘 굶으니 죽더라’는 속담이 있지만, 당장은 오해를 받아도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지금의 불화와 분열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보다 큰 정치’를 죽이는 일이다. ‘소통으로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며 가장 중요한 가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광형 KAIST 석좌교수는 ‘동아광장’ 칼럼 ‘질문과 칭찬이 창의성 길러준다’(11월 18일자)에서 ‘질문’의 중요성을 잘 지적해 주었다. 나는 ‘질문’ 뒤에 오는 것, 곧 질문 받는 자가 질문을 잘 소화할 때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짐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 사회가 계속되는 질문 내지 반론과 그에 대한 신실한 대응을 통해서 날로 더욱 크게 진전해야 할 것이다.

송우혜 객원논설위원·소설가 swh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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