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상호]국방개혁, 병영 폭력부터 없애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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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대학 휴학 후 군에 입대해 신병훈련을 받고 자대에 갓 배치된 졸병 시절.

고된 일과를 끝내고 돌아간 내무반(현 병영생활관)은 발을 뻗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성미 고약한 선임병들이 군기가 빠졌다며 거친 욕설과 함께 대걸레 봉을 휘두르며 ‘몽둥이찜질’을 하는 등 집단 구타를 일삼아 내무생활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일부 동료는 내무반에서 곤히 자다 평소 찍혀 있던 고참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가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칠흑 같은 밤에 막사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퍽퍽 하는 구타와 동료의 신음 소리에 입술을 깨문 채 밤새 뒤척인 기억이 생생하다.

다음 날 아침 시퍼렇게 멍든 채 풀이 죽은 동료의 얼굴을 보고 모든 부대원은 간밤의 사태를 눈치 챘지만 아무 일 없는 듯 넘어갔다.

간부들도 병사들이 알아서 군기를 잡아야 부대 지휘와 통솔이 편하다는 이유로 병영 폭력을 사실상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휴가를 나갔다 다른 부대에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 군 생활의 애환을 나누다 구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누가 더 많이 맞았나’를 겨루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군대는 원래 폭력이 정당화되는 곳이고,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된다’는 불문율과 군에서 구타는 ‘필요악’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군 내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이런 씁쓸한 기억 탓에 기자를 비롯해 대한민국의 남성 대부분에게 군 생활은 인생의 의미 있는 경험이지만 다시 돌아가라면 선뜻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구타와 가혹행위 등 고질적 병영악습은 군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해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병사들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5년간 군 내 자살자는 꾸준히 늘었고, 한 해 80여 건에 이르는 군내 자살의 상당수가 구타와 가혹행위 등 병영폐습이 주된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입대한 지 3개월 만에 목을 맨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육군 모 부대 소속 김모 이병도 죽기 전 “매일 맞고 혼난다, 자살하고 싶다”고 가족에게 호소했다.

군 당국은 과거부터 군 내 자살의 주원인을 ‘복무 부적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엔 인내심이 부족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병사들의 나약함을 질책하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군 내 자살사건을 접할 때마다 군이 시대 변화에 맞도록 병영 환경을 개선하지 못한 책임을 병사 개인의 문제로 떠넘긴다는 생각이 든다.

국방부는 여러 차례 병영문화 개선대책을 추진한 결과 구타 같은 병영악습이 많이 사라졌고, 일부 부대의 문제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군이 그간 추진했던 대책은 대부분 과거 발표했던 내용을 재탕 삼탕한 것이고, 연례행사처럼 거듭되는 병영 폭력사건들을 보면 이 같은 설명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실제로 올해 7월 발생한 해병대 총기사건을 비롯해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준 각종 병영참사의 이면에는 구타와 가혹행위로 병들고 곪은 병영 환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살을 방조하는 병영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한 군이 바라는 국민의 신뢰를 얻는 강한 군대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국방개혁의 출발점은 상부지휘구조 개편 같은 거대 담론보다 군 내 전근대적 병폐를 말끔히 제거하는 병영개혁이 돼야 하지 않을까.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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