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시민단체 피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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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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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바야흐로 시민단체 전성시대다. 시민단체에서 종교단체를 떠올리게 할 만큼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고, 수사기관 뺨치는 감시망으로 권력층의 부정과 비리를 들춰내 감탄을 자아내는 시민단체도 있다.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시민단체도 많지만 권력지향적인 일부 시민단체에 당해본 사람들은 머리를 내두른다. 대기업 임원 A 씨도 그런 경우다.

“유명 시민단체의 새파란 간부가 머리가 허옇게 센 우리 사장 앞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협박하듯 ‘도와주셔야죠’라며 거들먹거리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시민권력’이라지만 그게 어디 돈 얻으러 온 사람의 태도인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국고 지원금과 기업 후원금을 뜯어내려고 반정부, 반재벌을 생존 기반으로 삼고 달라붙던 시민단체는 또 얼마나 많았나. 오죽했으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시시모(시민단체를 감시하는 시민의 모임)’라는 시민단체를 만들 생각까지 했겠는가.”

그는 민주당이 손잡은 ‘범(汎)박원순계’에 대해 좌파 정당에다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온갖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외연(外延)을 종잡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보다는 슬쩍 ‘좌(左)클릭’한 한나라당이 민주당 지지세력 주류의 정서와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사사건건 얼굴을 붉혀온 두 정당이 당장 ‘가치 연대’를 하기는 어렵겠지만. 실현 가능성을 떠나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싶다. 사실 요즘 두 정당의 ‘존재감’을 살펴보면 서로 치고받기도 머쓱하다. 피차 안철수와 박원순이라는 돌풍 앞에 발가벗겨져 초라한 몰골을 드러낸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 아닌가.

두 정당은 서로 베끼기에 바쁘다. 몇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노무현 정부 때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주자고 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수혜 범위를 60%로 줄이자고 맞섰다. 결국 70% 절충안에 합의했다. 그때는 한나라당이 진보정당이었을까. 여당 때와 야당 때의 논리가 다르다면 복지라는 가치를 놓고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 다가올 선거를 겨냥한 ‘박근혜 복지’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미미한 ‘가치 간극’을 그나마 더 좁혀놓을 것이다.

독일의 정통 진보정당인 사민당은 중도 노선으로 선회한 지 오래다.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 사민당을 탈당한 사민당 좌파, 노동계 등이 연대한 좌파당과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보수 기민당과 몇 차례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긴축 재정, 노동시장 유연화에 동의했다. ‘몇 줌’의 좌파 지지층이 이탈하는 것을 감수하고 다수 유권자의 뜻을 받들었다.

민주당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이 끌어안으려는 운동권 시민단체들 중 상당수가 낡은 좌파 노선에 집착한다. 숫자도 많고 이름도 제각각이지만 굵직한 어젠다가 불거지면 약속이나 한 듯 친북(親北) 반미(反美) 반(反)시장의 이념을 덧칠하고 획일화된 행태를 보인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석방을 요구하는 ‘범국민공동대책위’엔 한국진보연대 등 62개 단체가 참여했다. 주요 단체들은 광우병 촛불시위, 반값 등록금 도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전면 무상급식 실시,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집회, 제주 해군기지 반대 투쟁 등에 함께 참여해 똑같은 목소리를 냈다. 도대체 반값 등록금이 해군기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단체 피로증(疲勞症)도 함께 커지고 있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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