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주성]위기에 빠진 정당민주주의를 되살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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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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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한국교원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김주성 한국교원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서울특별시의 주민투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커다란 위기에 빠져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의 꽃이어야 할 주민투표가 어느새 천덕꾸러기 악의 꽃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거문화는 여야의 주도로 반민주적인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민주주의를 회생시키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야는 이 시점에서 협상에 나서야 한다. 앞으로 투표를 거부하는 선거운동은 어떤 경우에도 벌이지 않기로 말이다. 여야 모두 투표 거부운동을 해 온 경력이 있으니 서로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합의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오랫동안 여러 차례의 여야 합의로 선거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투표 거부운동을 그만두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민주주의를 고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투표 거부운동을 하면 주민들은 투표장에 마음 놓고 가지 못한다. 서울시 주민투표에서 드러났듯 기권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투표장에 가면 단계별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보수골통으로 낙인찍힐까 봐 걱정했다. 마치 북한에서 검은색 투표함, 즉 흑함에 투표지를 넣으면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듯 말이다.

이번 투표는 공개투표나 다름없었다. 공개투표는 독재정권이 가장 좋아하는 투표 양식이다. 누가 순종하고 누가 저항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에서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반대표를 던질 수 없다. 북한에서는 반대표를 넣는 흑함이 없어졌다. 누구도 반대표를 던질 수 없기 때문에 흑함은 소용없게 된 것이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북한 독재정권처럼 탄압받을 리 없는데 공개투표라 한들 무슨 걱정거리냐고 말이다. 사실상 민주주의의 발원지였던 그리스 아테네의 민회에서도 공개투표를 했다. 6000명 정도가 모였던 민회에서는 공개적인 거수투표를 했다. 집단감정에 휘둘리는 포퓰리즘이 극성을 부리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현대 민주사회에서도 공개투표가 위험한 까닭은 다수의 횡포 때문이다. 익명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힘은 미약하다. 어떤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외톨이처럼 따돌림 받기 십상이다. 집단 따돌림은 존재감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다수의 폭력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속뜻을 감추고 남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이번에 ‘나쁜 투표, 좋은 거부’라는 구호가 등장하자 투표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가하면 나쁜 사람으로 보이고 거부하면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투표장에 가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되면 투표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낮은 투표율은 민주주의의 재앙이다.

현대정치에서는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낮은 투표율로는 민의가 정확하게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율이 낮으면 그만큼 정치적인 정통성이 약화된다. 그런데도 우리의 정당들은 투표 거부운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번에는 야당이 대대적으로 투표 거부운동을 했지만 여당에도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남시나 제주도에서 여당도 투표 거부운동을 했다.

양당은 서로 상대방의 투표 거부운동을 반민주적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자신들의 투표 거부운동은 합법적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국민 사이에 정당 불신과 정치 혐오증이 증폭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정당 지지자들은 줄어들고 무당파가 급증한다. 정당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로 보면 무당파가 유권자의 52%나 된다. 유권자의 과반수가 불신하고 있다면 정당정치의 장래는 암담하다. 정당이 민주정치의 중심축으로 살아남으려면 당리당략을 좇으면서 제살만 깎아먹지 말고 유권자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번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여야는 투표 거부운동을 하지 않기로 약속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국회 개원을 정치 협상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김주성 한국교원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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