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제균]박원순의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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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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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정치부장
박제균 정치부장
“길 가다 지갑 주웠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돼요.”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인구에 회자된 당시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노무현 탄핵풍’으로 지지율이 솟구친 열린우리당을 향해 던진 말이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석권해 의석 과반수를 차지했다. 참으로 엄청난 바람이었다. 이 바람으로 금배지를 단 열린우리당 초선의원들은 ‘탄돌이’로 불렸다.

박원순 지지율은 자기 것? 안철수 것?

그 후 오랜만에 한국 정가에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안풍(安風)’이다. 그 바람을 타고 아찔하게 날아오른 이가 박원순 변호사다. 안 원장과의 단일화 이전 미미했던 그의 지지율은 단일화 이후 각종 가상 양자대결에서 50% 안팎으로 가파르게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든다. 작금의 박 변호사 지지율은 자기 것인가, 안철수 것인가. 박 변호사 표현대로 ‘정치권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합의’에 국민은 감동했다. 안 원장은 10여 분간 박 변호사가 왜 서울시장에 출마하려는지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변호사님의 의지가 얼마나 굳건한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장면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영화의 각본, 감독, 주연은 모두 ‘안철수’다. 이 아름다운 영화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인지도가 크게 올랐지만 ‘박원순’은 어디까지나 조연이다. 이제 영화는 끝났고, 주연은 사라졌다. 어쩌면 박 변호사는 ‘남은 조연’에게서 ‘사라진 주연’을 느끼고 싶은 심리가 만든 ‘안철수의 아바타’일지 모른다.

그만큼 박 변호사의 지지율은 불안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안 원장이 박 변호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면, 현 지지율의 원천인 안 원장의 인기가 떨어진다면 어쩔 것인가.

공연히 가정(假定)만 갖고 트집을 잡는다고? 하지만 정치는 생물이다. 노무현 탄핵풍으로 당선된 ‘탄돌이’들이 4년 후 선거운동 때 노무현의 ‘노’자도 꺼내기 어려워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바람으로 당선된 그들은 18대 총선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보금자리였던 열린우리당마저 18대 총선을 치르지도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 했다.

박 변호사는 단일화 성사 직후 “안 원장이 갑자기 ‘양보하겠다’고 해 깜짝 놀랐다”고 했다. 내가 더 깜짝 놀란 건 시민사회단체 사이에서 ‘인품과 통찰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아온 그가 그런 단일화를 받아들인 점이다. 단일화 당시 다자 지지율 기준으로 안 원장은 40%, 박 변호사는 5% 정도였다. 10∼20%포인트 차이도 아니고, 이만큼 차이 나는데 열세인 쪽으로 단일화가 되는 건 대의(大義)에 맞지 않는다. 아니, 대의를 떠나 이런 단일화를 받아들일 때 박 변호사의 인간적 자존심이 꿈틀거리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안철수 ‘선의’는 두고두고 빚

무엇보다 정치의 세계(안 원장도 사실상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으므로)에서 안 원장이 보여준 ‘과도한 선의’는 박 변호사에게 두고두고 빚이다. 박 변호사가 서울시장에 당선된다면 정치적 채무는 더욱 커진다. 물론 안 원장이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빚 갚으라’고 독촉한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처럼 나올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진 빚이 끝내 족쇄가 되는 경우를 숱하게 봐오지 않았던가.

만일 그날, 박 변호사가 안 원장의 양보를 ‘깜짝 놀라며’ 받기보다 “나로 단일화되는 건 대의에 맞지 않는다”며 사양했다면…. 그게 시민사회에서 ‘맑은 사람’이란 평가를 들어온 그답지 않았을까. 정치적으로도 훨씬 더 큰 자산을 쌓았을 텐데…. 부질없는 상상이 꼬리를 문다.

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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