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형삼]이스털린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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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0일 20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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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국회의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이스털린의 역설을 들어봤냐”고 물었다. 박 장관이 “처음 듣는다”고 하자 손 대표가 교수 출신답게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을 넘어서면 국민의 행복과 삶의 질이 정체된다는 것”이라고 강의하듯 설명했다. “성장으로 고용 분배 복지를 모두 해결한다는 생각을 바꾸라”는 주문이 이어졌다. 대학 시절 경제학을 전공했고 평소 현란한 전문 용어를 구사하던 박 장관이 정말 몰랐을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소리를 들을까 봐 모르는 척한 걸까.

▷1974년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소득이 어느 수준에 올라 국민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 증가가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같은 국가 안에서는 고소득층이 저소득층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국가끼리 비교해 보면 국민의 행복지수가 1인당 소득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방글라데시 같은 가난한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미국 프랑스보다 높게 나온 연구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200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벳시 스티븐슨 교수팀은 132개 국가의 5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복지 인프라가 잘 갖춰진 부국(富國)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빈국(貧國) 국민보다 행복 수준이 더 높았다며 이스털린의 이론을 반박했다. 그러자 이스털린은 조사 범위를 더 넓혀 지난해 발표한 새 논문에서 한국 등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논리를 거듭 주장했다. 조사기간 중 한국의 1인당 소득이 2배나 늘었지만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스털린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전후해 행복지수가 정체되기 시작한다고 본다. 한국은 바로 경계선에 있다. 손 대표는 그런 맥락에서 성장 지향 정책을 경계한 듯하다. 그러나 명목 소득이 얼마가 됐든 치솟는 물가와 사교육비로 가처분소득이 형편없이 쪼그라든 우리 국민에겐 아직도 더 큰 빵이 필요한 것 아닐까. 야당 대표에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대법원장 임명동의 같은 현안을 신속하게 처리해 국민의 ‘정치적 행복지수’를 높여줄 책임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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