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디지털 치매

  • Array
  • 입력 2011년 9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아내가 남편 앞에서 시댁에 전화하는데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마침 휴대전화 전화번호부가 지워진 상황이었다. “얼마나 전화를 안 했으면 엄마(시어머니) 집 전화번호도 까먹었느냐”며 화내는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다. 평소 노래방을 휘젓던 사람이 진짜 실력발휘를 해야 할 자리에서 침묵하는 경우도 있다. 항상 노래방기계 화면을 보며 노래하다 보니 가사를 외우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한 이후로 길눈이 어두워진 운전자가 많다.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이나 계산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디지털 치매’를 겪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검색이든 길안내든 일정관리든 뭐든지 척척 알아서 해주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등장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요즘에는 차를 세워둔 주차장 구역을 찍어놓으면 나중에 위치를 안내하는 주차위치 기록 애플리케이션도 나왔다. 스마트폰을 가져오지 않은 어느 날 차 세운 곳을 찾지 못해 1시간 넘게 헤맸다고 고백한 지인도 있다.

▷세계적 경영컨설턴트인 니컬러스 카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터넷 때문에 뇌가 퇴화해 궁극적으로 인류는 적자생존 생태계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뇌는 쓰면 발달하고 안 쓰면 퇴화한다. 뇌구조가 물리적 자극에 따라 변화하는 성질이 있어서다. 뇌에서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에 대한 연구가 좋은 예다. 런던 택시운전사들의 두뇌를 학자들이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했더니 보통사람보다 해마 부분이 더 컸다고 한다. 런던에서 택시 면허를 따려면 런던의 복잡한 길을 외워야 하므로 해마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캐나다 언론학자 마셜 매클루언에 따르면 모든 매체는 감각기관의 확장이다. 책은 눈의 확장, 옷은 피부의 확장, 바퀴는 발의 확장이다. 그런 견해에서 본다면 인터넷은 뇌의 확장이다. 자질구레한 기억정보를 인터넷에 넘겨버리면 사람이 보다 본질적이고 창의적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다. 잡학사전 같은 지식을 암기하는 일일랑 검색 기능에 맡겨버리고 그 시간에 차원이 높은 공부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으로 구성되는 존재다. 기억력이 계속 퇴화하다 보면 뇌가 어떤 진화과정을 밟을지 궁금하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