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유재동]최고급 호텔 스위트룸 뺨치는 카다피 전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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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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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국제부 기자
유재동 국제부 기자
리비아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지방과 트리폴리 같은 대도시를 며칠째 다녔지만 영어로 된 간판이나 이정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영어를 썩 잘하는 리비아인도 만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서민은 영어로 숫자조차 제대로 못 센다.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는 집권 기간 중 자국민의 영어교육을 사실상 금지했다. 1969년 친서방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뒤부터 ‘독립 리비아’ ‘단일 아랍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42년간 나라를 지배해 왔다. 이 때문에 리비아 국민 상당수는 혁명 이후 개인적 포부를 묻는 질문에 “영어 공부”라는 대답을 한다.

그런데 카다피는 자국민의 영어 공부는 막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후계자로 유력했던 둘째아들은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트리폴리 함락 이후 카다피의 아들들이 버리고 간 호화저택에선 유럽산 고급 승용차와 명품 의류, 할리우드 영화 DVD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아랍의 자주독립을 구실로 국민의 눈은 가리면서 자신들은 서방의 화려한 문명 생활에 도취돼 있었던 것이다. 국민이 수만 명이 넘는 가족과 동료들을 잃고서도 혁명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것은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정권에 대한 뿌리 깊은 배신감이 한 원동력이 됐다.

31일 트리폴리 국제공항에 있는 카다피의 전용기 내부를 들여다봤다. 전용기 안의 호화로운 장식과 침구 등은 리비아가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머니를 오직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에 허비했음을 보여줬다. 그는 평소 자신이 유목 민족의 후예라며 소탈한 천막생활을 즐긴다고 말해 왔다. 전용기의 서랍장에 있는 체스판에도 눈길이 갔다. 순간 그가 내전이 한창이던 올 6월 러시아의 국제체스연맹 회장을 리비아로 초청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하루에 수백 명씩 국민이 죽어가는 와중에 그는 한가롭게 체스나 즐겼던 것이다.

리비아는 국가는 부강하지만 국민은 가난한 나라다. 석유를 팔아 번 돈은 카다피 일가나 정권 핵심들이 주로 챙겨간 반면 국민의 실업률은 30%에 육박하고 빈부격차도 극심하다. 다수의 중산층과 서민은 라마단 기간에 침도 함부로 안 삼킬 정도로 금식을 철저히 지키지만 일부 부유층은 겉으론 무슬림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론 이슬람 국가가 아닌 곳으로 해외여행을 떠나 스스로 라마단을 깬다. 리비아 혁명은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독재 정권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역력히 보여준다.

지금 리비아 국민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 하루빨리 평화와 안정을 되찾아 건강한 리비아를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진심으로 응원을 보낸다. ―트리폴리에서

유재동 국제부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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