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기홍]헨리의 눈으로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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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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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8개월째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뒤흔들고 있는 재스민혁명, 미국 재정위기에 따른 국가신용등급 강등, 유럽의 위기….

올해 들어 지구촌을 뒤흔든 격변의 목록을 보다 문득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어느 것 하나도 2011년에 이슈가 될 것이라고 지난해 말에 예측됐던 게 없기 때문이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전 세계 언론과 석학들이 새해 지구촌 이슈 전망을 쏟아놓는데 어떻게 하나도 못 맞힌 걸까. 동일본 대지진 같은 자연재해나 노르웨이 테러 같은 돌발사건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중동 변혁, 미국 재정위기 같은 일의 징후를 전문가들이 읽지 못했던 이유는 무얼까.

‘헨리의 이야기’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헨리는 잘나가는 변호사다. 어느 날 강도에게 총을 맞고 혼수상태를 거쳐 깨어나지만 과거의 기억을 잃게 된다. 새로운 헨리의 눈을 통해 본 ‘사고 전 헨리’의 삶은 온통 비정상투성이였다. 불륜, 협잡, 해체로 치닫는 가족관계…. 사고 전의 헨리는 비정상의 일상 속에 젖어 있다 보니 그것들이 비정상인지조차 모른 채 지냈던 것이다.

석학과 중동 전문가들이 신년 벽두부터 터져 나온 이슬람 민중들의 봉기를 그 직전까지 예측하지 못했던 것도 이슬람권의 독재 현실에 너무 오래 익숙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의 특성상 민주혁명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선입견도 눈에 백태처럼 끼었을 것이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에서 터져 나온 함성은 자유 인권 생존권이라는 기본권은 인간에게 공기와 물 같은 존재이며, 그것이 박탈된 비정상 상태는 그 어떤 종교, 지역, 체제에서도 더는 용인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대세에서 북한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의 3대 세습, 인권 탄압은 그 어떤 논리로도 변명할 수 없는 부조리의 극치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서든, 아니면 ‘우리에겐 아무런 해결 도구가 없다’는 무기력감의 발로이든, ‘자칫하면 우리도 피해를 본다’는 생각 때문이든, 우리는 그런 비정상을 으레 그런 것이려니 여긴다. 하지만 지구촌의 격변들은 이제 비정상의 성역은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도 비정상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이미 수년째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났는데도, 다들 “미국이니까 괜찮을 거야”라며 심각한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럽이 앓고 있는 복지병도 마찬가지다. ‘복지천국’을 지탱하기 위해 경제의 건전성을 희생시켜온 비정상적 시스템은 더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외부세계에서는 유럽을 복지천국이라며 부러워하고 꿈꿔왔지만 그 안에서는 비정상이 고름처럼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무상복지 논란도 헨리의 눈으로 보면 답이 보이지 않을까. 미국의 아시아문제 전문가인 마이클 슈먼은 타임지 기고문에서 한국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시아인들이 서구의 복지정책을 모방해 미래에 (현재 서구가 앓고 있는 것과) 같은 문제를 물려받을까? 아시아의 정치인들에겐 서구의 경험에서 배울 많은 선례가 있다. 그들이 (서구와) 같은 실수를 답습할지 지켜보자.”

외부인의 눈에는 보이는 걸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보기 힘든가 보다. 헨리처럼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비정상을 분별하는 눈을 갖게 된다면 너무 늦지 않을까.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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