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프리즘/홍권희]공생발전론 압박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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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4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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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권희 논설위원
홍권희 논설위원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국회에서 혼쭐이 났다. 대기업 경영자 대표로 ‘악마’ 소리까지 들었다. 정치권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다하라”고 주문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일부 대기업의 ‘탐욕 경영’을 비난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이라며 ‘공생발전’이라는 신조어를 내놓고 윤리경영을 강조했다.

모든 조직에 사회적 책임 따른다

정치권이 대기업에 CSR를 강하게 요구하는 국면이다. CSR는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라에 따라, 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다를 수 있고 한국 특성에 맞춘 한국형 CSR를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공생발전론을 포함해 대기업에 대한 요구의 대부분이 국제적인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

이 대통령은 ‘빈부격차 같은 시대적 그늘을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해’ 공생발전을 말하게 됐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이 공생발전이라는 용어의 저작권자라고 덧붙였다. 정말 그렇다면 큰 약점이다. 대통령 혼자 만든 방안이 오래가겠나 싶다. 여러 사회 주체와의 합의 과정을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 1990년대 중반, 유엔 등 국제기구가 2000년대 초반에 CSR의 개념과 실천방안을 정리할 때 각계 전문가가 두루 참여했다.국제표준화기구(ISO)가 26000이라는 국제표준을 만들 때는 정부 기업 노동 소비자 비정부기구 기타 등 6개 이해관계자 집단의 전문가들이 나섰다. 여성 전문가도 꼭 포함시켰다. 선진국인 스웨덴과 개도국인 브라질이 작업반의 공동의장을 맡았다. 이런 배려는 정치적 쇼가 아니라 합의안을 오래 유지하고 잘 이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정치권과 사회단체 일각이 요구하는 한국형 CSR는 대기업에만 거의 무한대의 사회적 책임을 지우려 한다. EU는 각계의 논의를 거쳐 2004년 ‘모든 조직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업 노조 시민단체 정당 등이 각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CSR에서 기업을 의미하는 ‘C’자를 떼고 ‘SR’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 10년 가까운 논의 끝에 작년 11월 발효된 국제표준도 그랬다.

한국에서 기업의 탐욕은 문제고 정당이나 노총 같은 조직들의 탐욕과 탈법은 눈감아줘도 좋은가. 사회 전반에 대기업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회 규율을 좌우하기도 하는 이들이야말로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영세하고 경쟁력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중소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가. 중소기업에도 나름의 사회적 책임이 있고 실제로 국내외 상당수 중소기업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실천동력은 압박 아닌 자발성

사회적 책임은 자발적 실천이 생명이다. 조직이 기부나 봉사보다 본업과 관련된 사회적 책임 활동을 통해 계속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ISO 26000은 인증서도 없다. 대신 기업들은 매년 경영실적 보고서를 만들 듯이 ‘SR보고서’나 ‘지속가능 경영보고서’를 만들어 1년간 어떤 취지로 어떤 사회적 책임 활동을 펼쳤는지 밝힌다. 이해관계자들은 보고서를 보면서 착한 기업인지 나쁜 기업인지 가늠할 수 있다.

국회에서 혼나고 대통령에게 야단맞은 기업들이 갑자기 CSR 활동에 나선다면 곧 시들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 대통령은 31일 30대 기업 간담회에서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북돋우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재정을 마구 풀어 대중이 원하는 사업을 벌이려는 것만이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 아니다. 정부가 법규를 통해 대기업의 경영 관행 개선을 유도하지 못하고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식으로 압박하면서 성의 표시를 요구하는 것도 대기업 반대 정서에 호소하는 포퓰리즘이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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