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조성하]울릉도 그리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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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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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대한민국의 영토이면서도 역대의 위정자로부터 버림받은 고아가 되어 2만의 도민은 단군의 피를 받은 배달겨레이면서도 본토의 국민으로부터 망각된 지 오래였다….’

어딜까. ‘울릉도’다. 1963년 울릉도 저동항에 건립된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 순찰 기공비’의 첫 문장이다. 비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당시 울릉도는 열악했다. ‘연락선’(금파호)은 이따금 다녔고 아주 느린 이 목선은 여객선도 아니었다. 당시 주민 수는 지금의 두 배 이상. 그나마 계속 줄어든 게 그랬다. 그런 만큼 ‘버림받은 고아’라느니 ‘망각됐다’는 표현은 오히려 점잖다.

그 오지를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찾았다(1962년). 기공비 설립 한 해 전, 5·16군사정변 이듬해였다. 그는 포항에서 해병대 상륙훈련 참관 직후 해군함으로 직행했다. 이 같은 국가원수의 전격 방문. 파격적, 돌발적이었다. 서슬이 퍼런 군정 치하였으니 ‘밀행’도 가능했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함장실에 잠입해 체류 내내 동행한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전 국회의장)의 근접취재 덕분이다.

섬에 도착한 10월 11일은 비가 내렸다. 군복 정장 차림의 박 의장은 회색 우의를 입고 우산을 쓴 채 적산가옥(일본식 주택)이 도열한 도동 중앙로를 걸었다. 잠은 군수의 관사에서, 식사는 다방에서 국수로 때웠다. 그런 가난한 섬이었기에 통치권자의 방문은 가치 있었다. 반세기나 지속될 천지개벽 급변화와 발전의 기틀이 마련돼서다.

첫 변화는 이듬해에 운항시간을 절반(10시간)이나 줄인 최초의 정기여객선 청룡호(350t) 취항. 5년 후엔 저동항이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됐다. 그때까지 부두 건설 등 인프라 확충에 엄청난 재정투자가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그뿐일까. 섬 일주도로, 수력발전소 등 숙원사업이 착수됐다. 방문 이듬해 의결(1963년 3월)된 ‘울릉도 종합개발계획’ 덕분이었다.

당시 도동(주거지역)과 저동(어업전진기지) 사이엔 길이 없었다. 유일한 이동수단은 목선. 그런데도 접안시설이라고는 없었다. 그 때문에 이곳을 오가던 박 의장 일행도 군함과 경비정을 교대로 바꿔 탔다.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먼바다로 떠밀려 나가던 경비정에서 탈출하느라 박 의장이 물에 뛰어든 것. 줄사다리로 군함에 오르다가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이래서 국가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구먼.” 구조된 후 박 의장이 무심결에 던진 이 말.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후다. 49년이나 흘렀고 여섯 명의 대통령이 선출됐지만 울릉도를 찾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일까. 당시 계획된 일주도로는 여태 미완성(4.4km 내수전전망대∼섬목)이다. 이 구간은 옛날처럼 배로 다닌다. 주민도 어업 대신 공단 취업차 줄줄이 섬을 떠 그 수가 3만에서 1만으로 줄었다.

49년 전 박 의장을 울릉도로 이끈 동인(動因). “이렇게 내팽개쳐 둘 거라면 차라리 일본에 팔아버리시지요”라는 말(울릉도 출신 한 공무원의 고언)이 결정적이었다. 독도 영유권 논란을 확대할 목적으로 울릉도까지 넘보는 일본 정치인의 무례한 시도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 대통령의 울릉도 방문은 마땅한 통치행위다.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때도 섬에선 군 최고통수권자의 ‘전격’ 방문을 내심 고대했었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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