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재희]교과서 개편, 甲지위 누리는 교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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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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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경인교대 영어교육과 교수
이재희 경인교대 영어교육과 교수
8월 고시할 초중고교 새 교육과정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교육과학기술부는 디지털 교과서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교과부의 정책이나 조치는 교육 현장과 업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파장과 고통을 부르기도 한다. 교과부와 교육 관련 업계는 갑을(甲乙) 관계인 경우가 있다. 문민정부 이후에도 교과부가 업계나 관계자에게 불리한 일방적인 조치를 취한 사례는 여러 건 있다.

첫째는 1993년 출판사에서 검정 교과서 출원을 위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출원 종수를 제한한 조치다. 당시 교육부 장관은 일부 출판사에서 너무 많은 검정 교과서를 개발해 낭비 요인이 있으므로 출판사마다 교과별로 1, 2종만 출원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일부 출판사는 집필이 거의 완료된 검정 교과서를 포기함으로써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비용이 허사가 되었다. 둘째 사례는 2007년 개정 교육과정과 교과서 검정 실시 공고에 따라 교과서를 개발하다가 교육과정 일부 개정으로 인해 작업 기간이 1년 이상 연장된 경우다. 교육과정 수시 개정 체제에 따라 2007년 다른 교과보다 먼저 개정된 수학과 영어 영역에서는 교과서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등영어 교육과정이 재개정돼 집필 작업 변경에 따른 시간과 경비의 추가 지출이 발생했다. 셋째 사례는 전년도 합격본에 한하여 올해 상반기에 실시된 상위 학년 검정 교과서 심사에서 무려 50%를 탈락시키는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물론 비록 전년도에 합격한 교과서라도 상급 학년 교과서의 질이 떨어지면 탈락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장차 교과서 선택을 소비자인 학교와 학부모에게 맡기기 위하여 교과서 인정제로 나아가는 방향에는 역행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교과서 심사 업무를 위탁한 교과부가 시장을 믿지 못하고 아직도 갑의 권한을 누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갑의 조치에 따라 을이 불이익을 받은 사례가 많았는데 앞으로도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현행 교육과정에 따라 진행 중인 검정 교과서 심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교과부는 2011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새 교과서 국정 또는 검정 대상과 일정을 공고할 예정이다. 교육과정 개편 때마다 교과서는 관행적으로 5년 이상 사용되었기 때문에 출판사와 저자는 그 기간의 소득을 기대하여 개발비와 노력을 투자한다. 따라서 교과서 사용 기간이 단축되면 단축 기간만큼 손실을 보게 된다. 둘째는 교과부가 디지털 교과서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결석생이나 소수 학생이 선택하는 교과에 적용하면서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사용 중인 e교과서나 장차 개발될 디지털 교과서는 서책 교과서보다 많은 개발비를 투입해야 질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교과서 개발 업체가 이용 학생이 적은 선택 과목에 많은 개발비를 투입하여 개발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많은 교사들이 서책과 디지털 교과서를 병행 사용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교과부가 검정 교과서 출판사에 서책과 함께 디지털 교과서를 개발하도록 요구하면 또 한 번 갑을 관계를 이용하는 것이 된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교육과정이나 교과서를 개선하는 것은 긴요한 일이다. 학교 교육의 근간은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교과 활동이기 때문에 교육과정과 교과서 개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관한 실험을 조급하고 무분별하게 실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교과부는 정책을 시행할 때 교육 소비자와 교육 공급자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교과부는 갑을관계에 앞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이재희 경인교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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