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교과서에 다 나오는 실패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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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5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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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하던 미국의 1980년대 초는 금융규제 완화의 시대였다. 당시 미 재무부는 주택모기지대출만 할 수 있던 저축대부조합(S&L)과 상호저축은행(MSB)에 상업용부동산대출, 소비자대출, 상업대출, 리스 업무에 진출하도록 허용했다. 이들은 높은 금리를 제시하며 돈을 빨아들여 고위험 고수익 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 기관의 경영진에는 새로운 종류의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노하우가 없었다. 규제당국인 연방저축대부보험공사(FSLIC)도 이들의 신사업을 감시할 전문성이나 인적자원이 없었다.

美 저축대부조합 vs 저축은행

결과는 부실화. 설상가상 폴 볼커 총재가 지휘하던 당시 미국 중앙은행(FRB)은 만성적 인플레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금리를 올렸고 S&L의 자금조달 비용은 급격히 올라갔다.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S&L이 많아지자 금융당국이 할 일은 부실 S&L을 솎아내 문을 닫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국은 거꾸로 행동했다. S&L이 자기자본을 계산할 때 무형자산인 영업권의 가치를 높게 재평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건전성 규제를 늦춘 것이다. 규제관용은 도덕적 해이를 증폭시켰다. 간당간당 숨만 붙어있던 ‘좀비 S&L’들이 이젠 초고위험 투자에 손을 댄 것. 사실상 망한 상태여서 실패해도 더 잃을 것이 없지만, 운이 따라준다면 회생도 가능하다는 계산이었다. 사막에 쇼핑몰을 짓고 대규모 자동화 투자를 했으며 정크본드를 구입했다.

초고위험 투자로 전략을 바꾼 좀비 S&L이 더 높은 금리로 시중자금을 쓸어가자 멀쩡한 S&L도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실의 전염이다. 좀비 S&L은 더 늘었다. 미루고 미루던 미국 정부는 1989년에야 정리작업에 들어가 전체의 25%인 750개의 S&L을 폐쇄했다. 하지만 조치가 늦어지면서 구제금융 비용은 1986년 추정된 150억 달러의 10배인 1500억 달러로 커졌다.

외국에서 벌어진 과거 얘기를 지금 꺼내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저축은행 사태가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 싶어서다. 금융감독을 늦추면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화폐금융이론’ 교과서에도 소상하게 나와 있는 일이며, 그것을 예방하는 방법까지 이미 확립돼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새삼 언급하는 것이다.

물론 부산저축은행에서는 더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 경영진이 남의 이름을 빌려 페이퍼컴퍼니 120개를 세운 뒤 4조6000억 원을 대출했다. 고위험을 넘어 불법이다. 골프장 납골당 태양광발전 운전학원 캄보디아공항 등에 막가파식 투자를 했고 120개 중 99개가 부실해졌다. 대주주와 친인척에게 7500억 원을 불법 무담보 대출했다. 대우그룹 사태 이후 최대의 분식회계를 했다. 가히 비리 백화점이다. 여기다 금융감독원은 부실 검사로 비리를 예방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금감원 출신 감사들은 경영진의 불법에 가담했다.

업계에 포획된 금융감독당국

하지만 이것이 ‘당국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당국은 상호신용금고라는 이름을 저축은행으로 바꾸고, 예금보호 한도를 높이며, 이들의 소액신용대출 규제를 늦추고, 부실 저축은행을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우량업체가 인수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등 끊임없는 규제관용을 베풀었다. 이런 행태를 두고 ‘당국이 업계에 포획됐다(captured)’고 한다. 놀라운 것은 부산저축은행은 나름 우량업체로 분류돼 여러 계열 저축은행을 인수한 주인공이라는 점.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 내몰린 저축은행들의 장래가 참으로 걱정스럽다.

금융위기는 금융 자체의 탐욕 때문에 스스로 잉태된다. 고수익을 위해 위험을 더 지려는 속성이다. 이를 막는 장치가 건전성 규제다. 은행위기는 이 규제를 부적절하게 완화하고, 부실 은행의 파산을 미루며, 예금자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않는 규제관용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교과서의 가르침을 최근 저축은행 사태는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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