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주향]친절하지 않은 한국,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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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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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한국인으로 사는 게 좋은가, 행복한가. 생각해보니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한 번도 미국인이나 유럽인으로, 혹은 아프리카인으로 태어났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으니 한국인으로 사는 게 좋은지 물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기분 좋지 않은, 그러나 긍정할 수밖에 없는 통계가 나왔다. 나라별 친절도를 계량화했을 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34개국 중 하위권인 21위란다. OECD ‘한눈에 보는 사회상’ 보고서의 내용이다. 한국, 한국인은 친절하지 않다! 그리고 신뢰도에서는 30개국 가운데 25위. 여기서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이 강세였다.

통계로 본 한국, 한국인은 팍팍했다. 계량화의 오류라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좋겠는데, 그보다는 우리를 드러내는 정직하고도 난감한 통계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우리가 생각해도 우리는 친절하지 않고, 나눔과 봉사에 인색한 것 같다. 사실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 배려할 줄 몰라도 삶은 계속된다. 그 누구도 친절과 나눔을 강요할 수는 없다. 강요된 선은 선이 아니므로. 때로 그것은 악보다 치졸한 것이므로. 그런데 궁금하기는 하다. 우리는 왜 친절하지 않고 배려할 줄 모르게 되었는지.

짓눌린 사람은 친절할 수 없다. 스스로 여유롭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나눌 수 없다. 마음이 열려 있지 않는 사람은 봉사할 수 없다. 우리 마음이 그렇게 팍팍해진 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성장동력이면서 괴물인 무한경쟁 시스템이 있다. 실제로 친절이 경쟁력인 시스템 속에서는 우리도 친절하다. 친절을 연기할 줄 아는 것이다. 삼성보다도 친절하다는 서울시 민원센터, 가전제품을 고치러 온 전문가들, 자동차 정기점검을 안내하는 사람들, 모두들 시스템 속에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친절하지 않은지. 그런데 종합병원에 가면 종종 느낀다. 아, 세상에 배려가 없는 친절이 있구나, 하는 것!

어려서부터 우리의 교육은 경쟁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점수와 등급이 전부인 가난한 교육환경에서 성장했다. 우리는 놀며 사랑하며 배려하면서 문득문득 경쟁을 배운 게 아니라 비교하며 경쟁하는 데만 익숙했다. 지금 중산층 1세대는 자기 안의 열정을 깨우기보다 머슴으로 뽑혀 죽도록 일만 하는 것을 생의 보람으로 알고 살아온 세대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 낸 그 세대가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거칠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성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의 말이 생각난다. “대개의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는 게 아니라 경쟁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들은 성급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숨이 차서 헉헉거리다 아름다운 경치를 하나도 못 보지요. 그러고 나서 깨달은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든 못하든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나는 길가에 주저앉아 작은 행복들을 산처럼 주워 모을 생각이에요.”

이제는 여유를 갖고 일로매진해 온 시간들을 살필 때다. 키다리 아저씨가 주디를 불우이웃으로만 생각하고 도왔다면 저렇게 살아있는 편지들을 받을 수 있었을까. 몇 푼 도와준 그 사람을 끝까지 ‘불우’이웃으로만 규정하는 가난한 감성으로는 불우이웃을 끝내 이웃으로 만나지 못한다. 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개미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세상에 무시해도 좋은 존재는 없다. 기쁨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슬픔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배려할 때가 있고 배려를 받아야 할 때가 있다.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물론 누군가를 도왔으면 잊는 게 좋다. 사랑은 빚을 준 게 아니니까. 반대로 자존감이 뭔지 아는 사람은 자기를 배려해준 손길, 눈길을 기억한다. 자기를 배려해준 친절한 손길에 대한 기억은 또 다른 사랑으로 흐를 테니.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사외(社外) 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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