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정치와 복지는 멀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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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31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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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극작가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원제 A tree grows in Brooklyn)’은 가슴 따뜻해지는 성장소설이다.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에 사는 아일랜드 이민가정의 소녀 프랜시가 가난과 알코올의존증 아버지의 돌연한 죽음 속에서도 꿋꿋하고 지혜롭게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미국에서 1943년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한 스미스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고해 쓴 자전적 소설이다.

생산 없는 복지의 무한 증식

공부와 글쓰기를 잘했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프랜시를 붙들어주는 것은 엄마 케이티다. 10대끼리 결혼해 청소와 세탁 등 잡일로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지만 공짜는 사절이다. 인상 깊은 장면은 땡전 한 푼 없어 온 가족이 굶주리고 남매가 학교를 중단하게 될 상황에서도 엄마가 주변의 경제적 도움을 거절하는 모습이다. 프랜시가 성추행범을 격퇴한 뒤 경관들이 모금을 해오자 엄마는 “도로 가져가세요. 저는 열심히 일하고 있답니다. 우리는 누구한테도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보편적 복지 논란 속에서 이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지금의 복지시스템을 만든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2000년 DJ 정부가 ‘생산적 복지’라고 이름붙인 복지정책은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다. 시혜적이고 임시방편적인 복지 프레임을 완전히 바꿔 복지는 정부 책임이라고 선언했다. ‘기초생활보장대상자’라는 용어가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바뀐 것도 그때다. 기초생활 확보는 국민의 권리라는 뜻이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생산적 복지)는 가난을 나라가 구제하는 것”이라고 자랑했었다. 돌이켜볼 때 ‘생산적 복지’의 아쉬운 점은 복지는 있는데 생산이 없는 것이었다.

10년이 흘러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예산 비중은 계속 늘었지만 마실수록 목이 더 마른 바닷물처럼 국민의 복지 갈증은 더 커지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발전단계로 보면 복지 담론이 등장할 환경은 성숙돼 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73.6%이던 중산층은 2008년 63.2%로 감소했고 2003년 18.3%이던 빈곤층은 2009년 20.2%로 늘었다. 빈곤층은 더욱 강력한 생계보장을 원하고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중산층도 정부가 보육 교육 주거정책에서 선진국형 복지를 강화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최근의 복지 담론이 10년 전과 다른 것은 정부가 아니라 정치권에서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 복지’는 무상급식 공약으로 재미를 본 민주당이 선점했고 한나라당도 지난해 서민과 중산층을 포함한 ‘70% 복지’를 내걸고 선심형 복지정책 경쟁에 가세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생활과 소득을 보장한다는 ‘한국형 복지’로 대권레이스에 시동을 걸었다.

복지 중독증 확산시키는 정치

선진국의 문턱에서 복지 확대가 논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그 논의는 전문가그룹에서 시작돼 정부에서 마무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치권이 복지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쥐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다. 정치인에게 복지란 나랏돈으로 자기 표를 사는 일이다. 방만한 복지로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의 노동사회보장부 차관 아시나 드레타는 “복지와 정치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복지가 권리가 되었을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배가 고파 맹물을 마시고도 헛트림을 하며 굳세게 버티던 우리 국민이 어쩌다 이렇게 국가 의존적으로 변했는지 놀라울 정도다. 국민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정치인이다. 정치가 복지 중독증을 국민 사이에 확산시켜 케이티처럼 남의 도움을 수치스러워하던 자존심마저 앗아가 버린 것이 아닌가.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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