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놓아버리기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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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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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이사를 앞두고 정리해야 할 물건이 산더미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이문재의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이사 때마다 넘쳐나는 욕망의 흔적

물건 욕심내지 말고 간소하게 살아야지, 집 옮겨 다닐 때마다 그토록 다짐했건만 이번에도 역시나다. 2년 만에 집안을 속속들이 둘러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먼지 쌓이듯 소리 없이 늘어난 세간은 시쳇말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언젠간 읽으려니 하고 꽂아둔 책, 유행도 지나고 치수도 안 맞건만 언젠간 다시 입을 거야 하며 모셔둔 옷, 필요 없는 물건까지 사들여가며 받아낸 백화점 사은품, 새해가 오면 어김없이 꺼냈다 슬그머니 구석에 처박아놓기를 반복한 어학용 카세트테이프, 한 번쯤은 더 보겠지 싶어 꼭꼭 챙겨놓은 수년 된 영화 비디오테이프…. 이집 저집 끌고 다녀온 물건들이 끈질긴 미련처럼 끝도 없다. 한평생 나를 끌고 다니느라 수고 많았다고 법정 스님은 노년에 자신의 육신을 향해 말씀하셨다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남루해진 세간붙이들에 고생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개미들이 줄지어 이사를 간다/저마다 뽀얀 알 하나씩 입에 물고/뽈뽈뽈뽈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한참이나 지켜봐도 이삿짐은 그뿐/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컴퓨터, 장롱… 같은 건/하나도 없다’(권오삼의 ‘이사’)

우리는 필요에 따라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일 수 있다고 법정 스님은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삶에서 뭐가 중요한 것이고 뭐가 비본질적인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수시로 자신의 삶을 냉엄하게 살펴서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신발 한 켤레를 팔 때마다 저개발국 어린이에게 한 켤레를 기부하는 ‘착한 마케팅’으로 성공한 톰스슈즈의 설립자 블레이크 마이코스키 씨는 집과 살림을 처분해 3년 전부터 배에서 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유하는 게 많으면 그것이 생각을 잡아먹는다. 적게 소유하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고 집중할 수 있다.”

버릴 건 버리고, 아직 쓸 만한 것은 새 주인을 찾아 떠나보내느라 청명한 가을을 보내는 동안 체득한 게 있다. 내가 감당할 수준 이상을 움켜쥐는 것은 스스로 스트레스를 부과하는 행위임을. 오죽하면 미국의 개념미술가 제니 홀처는 소비중독에 빠진 오늘의 상황을 성경말씀과도 같은 문자작품으로 표현했을까.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가 욕망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

나무처럼 내 안의 잡동사니도…

나도 이참에 수칙을 하나 정해볼까 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잣대는 ‘그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다, 남 주기 아직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그 물건을 주어야 할 순간이요, 싸거나 공짜라고 무턱대고 탐내지 않으며,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지를 구입 기준으로 정한다….

줄이고 정리할 것이 살림살이뿐이랴. 새로운 나이테를 더하기 위해 한때의 무성한 잎들을 다 내려놓기 시작하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내 안의 온갖 잡동사니도 비우는 연습을 하고 싶다.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바로 그 자리에/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새것 그대로/남아 있다/이 집에 이사 와서/벽지를 처음 바를 때/그 마음/그 첫 마음,/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액자 크기만큼 하얗게/남아 있다’(안도현의 ‘처음처럼’)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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