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2010 세계작가페스티벌서 만난 스페인 콜리나스-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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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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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어린아이 마음 소유자… 사명감 잃지 말아야”

‘2010 세계작가페스티벌’에서 만난 고은 시인(오른쪽)과 안토니오 콜리나스 시인. 두 사람은 “바다는 단일한 공간이되 단일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유동하는 장소”라면서 “수평선 너머 미지와의 소통이라는 바다의 시혼이 새로운 세기의 시 정신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2010 세계작가페스티벌’에서 만난 고은 시인(오른쪽)과 안토니오 콜리나스 시인. 두 사람은 “바다는 단일한 공간이되 단일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유동하는 장소”라면서 “수평선 너머 미지와의 소통이라는 바다의 시혼이 새로운 세기의 시 정신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콜리나스 씨와 알아온 지 20년 가까이 됩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석처럼 끌렸지요.” “고은 시인의 작품을 읽고 시와 삶이 가까이 있다는 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한국 시인 고은 씨(77)와 스페인 시인 겸 소설가 안토니오 콜리나스 씨(64)는 4일 경기 용인시 단국대 죽전캠퍼스 석주선기념박물관 앞에서 만나자마자 서로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밝혔다. 고은 씨는 현실 참여와 역사의식을 시로 형상해온 우리 문단의 원로 시인이다. 콜리나스 씨는 스페인의 주요 문학상을 휩쓴 시인이자 소설가로 6일 장편 ‘남쪽에서 보낸 일년’(자음과모음)을 국내에 선보인다.

1990년대 초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열린 국제시인대회에서 통성명한 뒤 교분을 쌓아온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은 이날 단국대와 동아일보사가 주관하는 ‘2010 세계작가페스티벌’의 ‘상상의 바다’ 포럼에 참석한 뒤 대담을 가졌다.

콜리나스=‘불타는 샘’이라는 스페인어 제목으로 번역된 고은 선생의 시선집을 읽었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사회의식 또한 생생한 시였어요. 시 고유의 음악성이 살아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은 활자로 읽기 위한 시가 대부분인데 시의 리듬감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고은=3일 행사 전야제에서 ‘사미라는 늑대를 사랑하네’라는 시를 낭송했지요? 콜리나스씨 작품은 헬레니즘 풍의 서정성을 갖추면서 유럽의 철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교양을 담고 있었어요. 시적 표현이 찬란한 데 놀랐습니다.

‘2010 세계작가페스티벌’은 ‘바다의 시 정신-소통의 공간을 노래하다’가 주제다. 문학의 바다는 수많은 시인의 시에서 수평선 너머 미지의 공간에 대한 열망으로 표현됐지만, 현실의 바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침략과 전투의 공간이었다.

고은=절망이 가득하던 30대에 제주도로 가는 배에 탔습니다. 배 위에서 죽으려고 작정했다가 체념하고 제주도에 몸을 두게 되었어요. 제주도에서 지낼 때 육지를 등지곤 종일 바다만 바라봤어요. 끼니때만 육지로 몸을 돌렸지요. 내 무덤은 바다 위에 있고 싶다, 파도가 내 비석이기를 바란다, 그때의 소망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콜리나스=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의 이비사 섬에서 1977년부터 21년을 지냈어요.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본 지중해가 제 시적 감성의 바탕이 되었어요. 인간도 섬과 다를 바 없구나, 생각하면서도 바다 앞에 있으면 평온해지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 같았지요.

고은=육지에 있으면 자신 안에 갇히기 쉽습니다. 육지란 높낮이가 있는 지역이어서 우리 내면도 그 지형을 닮아요. 타자와 담을 쌓고 있으면 내면의 골짜기에 머물게 됩니다. 콜리나스 씨의 ‘삶에의 신뢰’라는 시에 ‘생각들이 태어나는 바다’라는 시구가 있지요. 저는 바다가 그렇게 가능성의 공간, 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콜리나스=지중해는 세계사에서 전쟁터로 유명하지만 실은 서정시의 원천이었습니다. 저는 바다가 평화, 자유, 원숙한 존재, 창조, 조화 등과 같은 것들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바다의 시 정신이란 그런 심오하고도 충만한 의미로서의 상징이 아닐까요.

고은=그러나 빠른 속도로 변하는 신기술의 시대에 문학의 의미가 점점 퇴색하는 듯합니다.

콜리나스=유럽에서도 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옅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옥타비오 파스는 ‘시는 지하에 감춰져 있지 죽는 게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문학이 직면한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은=1945년 폴 발레리가 죽었을 때 프랑스는 국장(國葬)으로 예우했어요. 시인의 국장은 시가 이 세상에서 절정을 이뤘던 시대의 표상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시의 세계가 아닌 게 사실입니다. 시인으로서 나 역시 찬바람을 느낍니다만, 시에 대해 궁극적으로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현실에서 시의 절망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시장의 욕망이 춤추는 판에 시까지 춤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시가 잘 안 보이는 시대, 시의 밤, 시의 암흑도 경험해야 시가 새로 태어나는 창조적 모태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시인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인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이들은 “성인(成人)으로 ‘박제’되지 말 것, 사명감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고은=내게는 처음의 불길이 살아 있습니다. 6·25전쟁의 폐허에서 내 시가 나왔어요. 생존의 그 절박함을 갖고 시인이 됐습니다. 그때의 열망이 아직도 유효합니다. 시인은 진화하지 않는 인간의 원형을 갖춰야 하는 것이지요.

콜리나스=나 역시 어렸을 적 고향 마을이 폐허였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시 작품에 항상 영향을 줍니다. 종종 고향마을을 찾으면서 어린 시절 간직했던 시인의 꿈을 되새깁니다. 아이 적의 그런 열렬함이 계속해서 시를 쓰게 하는 힘이 됩니다.

7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고은 시인은 올해도 외신에서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고은 시인은 이날 “거기(노벨문학상)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면서 손사래를 쳤지만, 함께한 콜리나스 시인은 “꼭 수상하길 바란다. (고은 시인은) 그만한 문학적 성과를 이룬 시인”이라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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