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끝별]시린 마음 다독이는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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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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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파에 상처입은 영혼들 가족들과 치유의 시간으로

잦은 폭우와 드센 태풍에 좀체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올 추석은 이른 가을 추석이라지만 그래도 추석바람은 추석바람입니다. 구수하게 볏속을 맛들인 햅쌀바람, 새콤하게 사과를 맛들인 사과바람, 풋풋하게 대추를 맛들인 대추바람, 살갑게 명태속살을 맛들이기 시작하는 명태바람…. 이 가을을 새콤달콤하게 맛들이고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 가을바람입니다. 가장 달고 가장 신선한 그 첫 바람을 거두어 추석맞이를 합니다.

어디 이 바람들만 가을을 맞이하겠습니까. 이제 뿌리를 내린 뗏장 속 흙냄새를 몰고 오는 아버지바람, 부쩍 뒷덜미가 뻐근하다는 남편바람, 전립샘과 관절을 앓고 계시는 시부모님바람, 사업이 어려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언니바람, 오랜 투병생활에서 벗어나고 있는 작은시아주버님바람…. 바람 잘 날 없는 날을 견디느라 스스로가 바람이 된 일가친척바람도 추석을 맞이합니다.

이른 추석이건만 올해 추석바람은 유난히 차고 맵습니다. 물가(物價)는 비상이고 인가(人家)도 적막입니다. 며칠 전 밤늦게 큰형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응, 동서! 이번 추석에는 당일 아침 일찍 오라고. 내가 취직을 했는데 전날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해서….” 명절 전날이면 늘 큰아주버님댁에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이튿날 아침 차례까지 지내고 오곤 했습니다. 큰아주버님이 명퇴를 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사정은 친정도 여의치 않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형편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추석 전날은 각자 쉬고 추석날 새벽에 모두 아버님 유택에서 모이기로 했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니 그 흥성하던 명절이 완연히 적막해진 느낌입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시린 바람이 많습니다. 후배는 큰 수술을 했고 선배는 이혼을 하였습니다. 친구는 허리디스크에 이어 불면증을 호소하고 또 다른 선배는 쓰러지신 어머님 병간호에 입술이 부르터 있습니다. 연이은 취업 실패로 우울증에 걸린 후배바람도, 자살하겠다고 감기약봉지를 들고 소동을 벌였다는 동료바람도, 동호대교에서 휴대전화와 안경을 두고 뛰어내려버린 제자바람도 일었습니다.

그런 바람을 오랜만에 한자리에 불러들이는 큰바람이 추석맞이바람입니다. 흩어져 있던 바람이 제 난 곳으로 모여들어 지지고 볶고, 삶고 찌고, 무치고 데치고, 빚고 깎으며 온갖 냄새를 피워내는 날이 추석입니다. 그렇게 사나흘을 피붙이바람이 모여, 가슴에 뚫린 구멍을 서로서로 조금씩 메우고 메워주는 명절인 겁니다. 조금은 서운키도 했던 바람은 다시 잠재우고, 뜨겁게 다시 한패가 되어 훈훈한 바람을 일으키는 추석바람인 겁니다.

그러기에 추석바람(風)은 추석바람(願)입니다. 올 추석은 정말, 기울어진 어깨를 힘차게 다독여주고 웅크린 무릎을 힘껏 세워주는 그런 추석이었으면 합니다. 저 환하디 환한 한가위 달빛이 늘 우리 편이듯 말입니다. 추석(秋夕)이 추석인 까닭입니다. 그러라고 이 가을저녁의 한가위 달빛이 저리 둥글고 환한 겁니다.

올 추석에도 가슴 파인 바람이 모여 서로의 무릎을 맞대고 앉아 대춧빛 뺨이 되어 “못 먹어도 고!”를 외치는 그 흥성함을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삼팔광땡에 뜬 둥근 명월처럼 어여쁜 그런 달을 맞이하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살구꽃 본 듯 팔공산에 휘영청 뜬 저 탐스러운 달을 서로의 가슴에 채워주었으면 합니다. 보고보고 또 보면서 말입니다.

정끝별 시인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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