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保守, 공정을 위해 죽어야 산다

동아닷컴 입력 2010-09-08 20:00수정 2010-09-0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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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는 얘기지만 미국 아이들은 싸움을 할 때도 페어(fair·공정)하냐 언페어(unfair·불공정)하냐를 중심잣대로 다툰다. It’s unfair가 가장 무섭고 치명적인 심판이다. 페어한 게임의 결과에 대해서는 군말하는 게 언페어하다.

미국 아이들처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세계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어느 나라에나 공정한지는 의문이다. 국익이 부딪치는 문제에서 모든 나라가 수긍할 수 있는 공정성(fairness)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어머니들은 ‘자식이 커서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거의 정해진 문구처럼 답한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거나 주변과 불화(不和)해 잘못 살면서 ‘세상이 불공평하다’ 하고, 분배를 더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요 공정하지 못한 태도다.

한국 외교부 장관이 딸을 불공정하게 특채한 일로 사퇴하자 중국 누리꾼들은 ‘한국의 건강한 정치 메커니즘을 보여준 것’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낙마했을 때 ‘정치엘리트가 얼마나 비윤리적으로 행동해왔는지 보여준다’고 지적한 뉴욕타임스의 잣대로 공정을 따져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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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수혜자들이 솔선해야

영국 보수당의 연정 파트너로 사상 처음 정권에 참여한 좌파 자유민주당의 닉 크렉 당수(부총리)는 8월 25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공정이란 모든 아이들에게 태어난 배경과 상관없이 마땅히 가져야 할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다시 찾아온 공정’이라는 8월 27일자 사설에서 ‘크렉의 핵심 주장은 국민이 스스로 사회적 사다리를 올라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요약하고 ‘가장 좋은 방향은 친(親)성장 정책을 통해 장기적으로 계층 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크렉과 파이낸셜타임스의 견해는 한국 정부도 경청할 만하다. 다급한 나머지 유럽에서 실패로 판명된 ‘보편적 복지 포퓰리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와도 같다.

2003∼2005년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어젠다 2010’이라는 개혁 비전을 실행했다. 임금이 싼 동유럽으로 독일 공장들이 옮겨가지 않도록 노조원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노동시간은 늘렸으며 고용(채용과 해고)의 유연성을 높이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슈뢰더는 인기가 폭락해 정권을 잃었지만 ‘쓴 약’의 효과는 바로 2010년 지금 나타나고 있다. 한때 유럽의 환자로 추락했던 독일이 통독 20년 만의 최고 성장과 고무적인 실업률 하락 속에서 유럽의 성장엔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공정 담론과 관련해 경제사회적 기득층이 더 심각하게 원려(遠慮)해야 할 부분이 있다. 작년 12월 파리경제학대학의 클로디아 세닉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제출한 ‘수입 분배와 주관적 행복’ 연구보고서를 통해 ‘자신이 사는 사회에서 기회와 결과가 공정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 많을수록 재분배 정책에 대한 요구가 거세진다’고 밝혔다.

이런 요구가 포퓰리즘 정치와 맞물려 경제사회를 병들게 할 우려가 커진다. 이른바 기득층의 특권과 반칙이 판치면 사태는 더 악순환할 것이고, 체제와 제도마저 위협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권력과 부를 가진 쪽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급증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에 ‘공정한 사회’를 선창했다. 대통령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이 나라 정치경제사회는 공정에 대한 성찰과 자기수정(修正)의 행동을 통해 거듭날 필요가 있다. 공정 어젠다가 사회 곳곳에 넓고 깊게 뿌리내린다면 이는 어느 야당 의원의 말대로 ‘이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 될지도 모른다.

공정한 사회로의 업그레이드가 확실해지려면 권력 핵심부터 칼날 같은 공정의 잣대로 자신들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 대통령 친인척과 최측근부터 부메랑을 피하지 않고 사즉생(死則生)의 행동을 보인다면 공정의 가치는 물 흐르듯 사회 전반에 스며들 것이다.

부메랑 다 맞고 거듭날 때다

그러나 실제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냉정한 공정’을 결단하기는 쉽지 않다. 대통령 앞에도 갈림길이 여러 번 나타날 것이다. 국민은 대통령이 가는 길과 가지 않는 길을 지켜볼 것이다. 정권이 자신들의 문제는 빼놓고 심판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전두환 시대의 ‘정의사회 구현’을 닮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대한민국 헌법 가치를 존중하며, 자유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대다수 국민이 공정의 눈금을 최대한 잘 맞춘다면 세계의 존경을 받는 고급국가를 만들 수 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릴 일은 아니지만 특히 낡은 보수가 공정의 부메랑을 가차 없이 맞아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킬 보수가 살고 나라가 살 것이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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