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두영]단두대 위의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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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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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의 와중에 성직자와 변호사와 과학자가 반역죄로 단두대에 섰다. 먼저 성직자가 단두대에 엎드렸지만, 어디가 고장 났는지 칼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직자가 일어나서 “하나님은 나의 무죄를 알고 계신다”고 주장하고 풀려났다. 변호사의 차례에도 칼이 떨어지지 않았다. 변호사는 ‘같은 죄로 두 번 벌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을 강변하여 사형 집행을 피했다.

끝으로 과학자가 단두대에 올랐다. 이번에도 역시 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힐끗 단두대 위를 바라보던 과학자가 소리쳤다. “아!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았어요.” 인터넷에 떠도는 ‘과학자가 수명이 짧은 이유’라는 유머다.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주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과학자의 융통성 없는 성격을 빗댄 것이다.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 행정체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과학기술출연연 발전 민간위원회(민간위)는 최근 ‘새로운 국가과학기술시스템 구축과 출연연 발전방안(발전방안)’을 발표했다. 대통령 직속의 위원회가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권한을 갖고 정부출연연구기관을 국가연구개발원(가칭)이라는 단일법인으로 통합 운영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눈여겨볼 것은 민간위의 실체다. 젊은 피가 끓는 소장 과학기술자의 동아리도 아니고, 운동권이나 정치에 방향을 둔 과학기술자의 모임도 아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위원장(윤종용 삼성전자 고문)에다 산업계 과학기술계 행정학계 언론계의 최고 인사들이 모였다. 재미있는 것은 민간위에서 간사를 맡았던 김창경 한양대 교수가 최근 개각으로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으로, 발전방안을 만드는 토대를 제공했던 임기철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원장이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이다.

이번 발전방안은 과학기술계의 중진 인사는 물론 은퇴한 원로와 소장 과학기술자를 포함해서 노조 관련 단체까지 큰 틀에서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 “세종대왕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계가 이번처럼 똘똘 뭉친 적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실린더에서 피스톤이 왕복하는 거리를 ‘행정(行程)’이라고 한다. 따라서 증기기관이든 내연기관이든 실린더와 피스톤을 사용하는 엔진은 모두 행정기관(行程機關)이다. 과학기술자들은 이런 행정기관을 설계하고 개발한다. 그런데 과학기술자들이 최근 이와는 다른 행정기관(行政機關)의 설계도를 제안했다. 이 행정기관은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 엔진이다. 엔진이라는 측면에서 두 행정기관의 본질은 같다.

설계도를 받은 행정부처(교육과학기술부 지식경제부 기획재정부 등)는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이다. 행정부처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출연연구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행정체제 개편이 잦았지만 칼자루는 항상 그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단두대의 과학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행정부처는 단두대의 과학자처럼 융통성 없는 과학기술자들이 행정기관(行程機關)이나 제대로 만들지 왜 참견하느냐며 핀잔하고, 과학기술계는 목이 떨어져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는, 단두대의 과학자처럼 결연한 심정으로 행정기관(行政機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huhh2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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