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석민]꼭꼭 감추어둔 24억 원짜리 보고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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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찮은 처방에 고가 컨설팅비
수신료 문제 도덕성으로 풀어야

무더위가 절정이다. 이 찜통 날씨에 열기를 펑펑 내뿜는 곳이 있다. 수신료 인상 문제로 여야 추천 이사들이 팽팽히 맞선 KBS다. 이사회 발의 및 방송통신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회에서 승인돼야 하는데 첫 단추부터 이 모양이니 올해도 틀렸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한마디만 하겠다. 공영방송은 국영방송도 사기업도 아닌 국민의 방송이다. 정치권력, 시장자본이 아니라 국민이 재정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야 진짜 공영방송이 되고 국민이 그 진짜 주인이 된다.

따라서 수신료가 30년째 월 2500원으로 묶인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었다. 이유야 자명하다. KBS는 국민의 방송은커녕 권력의 시녀란 질타를 받아 왔다. 보수정권하에서는 보수방송, 진보정권하에서는 진보방송이었다. 그러니 기왕의 수신료도 아까운 판에 누가 돈을 더 내려 하겠는가.

하지만 이는 ‘아픈 사람 약 안 주고 내치는 식’으로 문제를 악화시키는 하수 중의 하수였다. KBS 입장에서야 상업적 자극성을 강화해 광고수입을 올리는 것 말고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당연히 공영의 정체성마저 흔들렸다. 게다가 KBS는 어찌됐든 공기업이다. 필연과도 같은 조직관리의 비효율성이 구석구석 똬리를 틀었다. 밀물에 사리, 장마가 겹친 격으로 정당성, 정체성, 효율성의 문제가 삼박자 리듬처럼 서로를 부추기며 회오리로 치솟았다.

배 아픈 데 빨간약 바르는 식의 대증요법이 이 총체적 위기의 대응책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공영방송 운영전반에 대한 근원적 분석과 처방이 필요했다. 그것이 올해 초 KBS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의뢰해 ‘경영진단, 조직재설계 및 인력운영계획’ 컨설팅을 진행한 이유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 진행됐다.

4개월간 11명이 투입된 컨설팅비가 무려 24억 원이었다. 컨설턴트 1인당 월평균 5000만 원, 주급으로 치면 1200만 원 이상 지급한 셈이다. 가히 천문학적이다. 필자 같은 대학교수가 이런 일로 받는 인건비는 월 200만 원 정도다. 공적 연구의 경우 보수가 아예 없기도 하다. 결과물은 또 어떤가. 2000만∼3000만 원 규모의 연구비면 보통 단행본 한 권 분량의 보고서를 쓴다. 24억 원이면 100권의 보고서는 족히 만들 거액이다. 그런데 BCG 중간보고서는 60쪽이라 한다. 해외의 전문 컨설팅이라 그렇다? 2000년, 또 다른 세계 유수의 컨설팅사인 아서앤더슨이 6개월간 수행한 KBS 컨설팅비는 3억 원이 채 안 됐다.

물론 전문 컨설팅의 성과를 반드시 비용이나 보고서 쪽수로 따질 일은 아닐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보고서의 내용도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마구잡이 베끼기로 일관한 조악한 결과물”이라는 혹평마저 눈에 띈다. 일례로 BCG의 조직개편안은 BBC와 NHK 같은 해외 공영방송 조직 일부를 인용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들과 KBS의 상황 차이가 고려되지 않았고, 개혁의 방향과 절차 역시 참신하지도 구체적이지도 못하다고 한다.

‘∼라고 한다’를 남발해 미안한 심정이다. 기실 필자는 이 보고서를 보지 못했다. 얼마 전 KBS가 주최한 한 공청회 자료집에 인용된 두어 쪽을 본 게 전부다. KBS 내에서도 일부 경영진 외에 이를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KBS 이사회에도 보고서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다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혹여 세간의 평가가 옳다면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BCG 컨설턴트들은 세계 유수의 경영학석사(MBA)과정 출신이라 한다. 하지만 미디어 전공자도 아닌 이들이 일반적 기업분석 방식으로 4개월 만에 난마처럼 얽힌 한국 미디어시장과 공영방송의 문제를 분석하고 처방까지 제시한다? 이는 애당초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었을 것이다.

급기야 한 시민단체 연대조직이 BCG 컨설팅의 절차상 하자와 예산의 과도함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감사원은 법규상 문제가 없다며 이를 기각했다. 법규상 과실을 가리는 게 본질이 아니기에 헛웃음이 나오지만 뭘 따지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다. 꼭꼭 숨겨둔 BCG 보고서를 공개하라는 것이다. 최소한 관련 전문가들에게만이라도.

BCG 컨설팅 시비는 쉬쉬하며 감춘다고 유야무야될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결과물은 공영방송 KBS의 향후 진로에 중요한 좌표가 될 것이기에 엄격한 검증을 거치는 게 옳다. 만약 그간의 일처리와 최종 결과물의 수준에 미비함이 있었다면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공영방송의 자세다. 책임질 일에 책임질 줄 아는 도의적 엄정함이야말로 그 어떤 값비싼 컨설팅의 그 어떤 묘수에 앞서, 30년 묵은 수신료 문제를 풀고 불신의 수렁에 빠진 공영방송을 구해내는 정도(正道)라 할 것이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

[알려왔습니다]

본보 8월 6일자 A30면 ‘꼭꼭 감추어둔 24억 원짜리 보고서’ 제하의 서울대 윤석민 교수의 ‘동아광장’ 칼럼에 대해 KBS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최종보고서는 2049쪽으로 수신료 현실화, 조직개편을 비롯한 KBS 혁신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또 이사진은 누구라도 보고서 열람이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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