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성철]수능이 운전면허 시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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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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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강남에는 진(眞) 선(善) 미(美)를 두루 갖춘 아이들이 많아요. 공부 잘하지요, 외모 출중하지요, 게다가 예의 바르기까지 하다니까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한 지인의 주장이다. 유전자가 우수한 부모가 자녀교육에 몰두하니 강남 아이들이 여러모로 잘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주관적이고 과장 섞인 견해다. 하지만 부모의 경제력과 자녀의 성적이 비례한다는 것은 통계로 증명된 사실이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세상이다.

최근 대학입시 관련 출판사와 인터넷 대입학원의 매출이 줄고 있단다. 교육방송(EBS)-대학수학능력시험 연계 강화 정책의 영향이다. 이 정책은 2004년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것이다. 농어촌과 도시 저소득층 학생에게 무료로 질 높은 온라인 수능 강의를 제공한다는 취지. 교육기회 불균형 해소에 나름의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념과 철학이 다른 전 정권의 정책이라도 방향이 옳으면 계승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정책 역시 빛과 함께 그늘도 있었다.

당시 EBS 강의에 참여했던 학원강사들이 유명해지면서 사교육 업체의 매출이 많이 올랐다. 일부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EBS 강의를 틀어주는 등 공교육을 보완해야 할 EBS가 오히려 공교육을 대체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올해처럼 EBS 교재에서 수능의 70%를 연계 출제하겠다는 정부 발표로 비롯된 현상이었다. 광풍이 잦아들면서 연계는 흐지부지됐고, EBS 덕분에 사교육비가 크게 줄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꺼져가던 정책이 6년 만에 되살아났다. 올해는 연계 체감률을 높이려고 수리영역은 숫자만 다른 문제, 외국어는 같은 지문도 내겠단다. 수능을 이런 식으로 내는 것이 과연 교육적으로 옳을까. 설령 70%를 똑같이 내도 나머지 30%를 두고 피나는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사교육비가 얼마나 줄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최근 학원마다 ‘수능 필수 EBS 특강’ ‘EBS 독해 연습’ 등 EBS 관련 강좌를 잇달아 개설하고 있다. 한 수험생 학부모는 “여름방학에 EBS 위주로 짜인 학원 강좌를 신청하고 EBS 교재를 수십 권 샀다”고 말했다. 교보문고의 상반기 EBS 교재 매출은 작년보다 40% 가까이 늘었다.

서울 모 여고 진학부장 교사는 “3학년의 경우 수업시간에 EBS 교재와 관련된 내용에만 학생들이 집중한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라고 개탄했다. 상위권 수험생들의 불만도 크다. 한 수험생은 “국가가 커닝페이퍼를 나눠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개했다. ‘수능이 무슨 운전면허 시험이냐’는 것이다.

무리하게 수능 출제와 결부시키지 않아도 EBS 수능 강의는 교육복지를 위해 충분히 의미 있는 정책이다. 정부가 굳이 수능 연계를 강행하겠다고 해도 EBS는 본분을 지켜야 한다. EBS의 본분은 교재매출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강의 업체들보다 우수한 강의와 서비스를 수험생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부가 ‘더는 EBS에서 수능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해도 수험생들이 사설업체보다 EBS를 선택할 것이다.

“같은 강사가 같은 내용을 EBS에서는 8강으로, 유료 인강 학원에서는 22강으로 강의를 해요. 강의 들으러 EBS 홈페이지에 갔다가 오히려 유료 인강을 들어야겠다는 생각만 굳어졌어요.”(올해 고교 3학년 수험생)

홍성철 동아이지에듀 대표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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