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현모]성공적 리더십 승계, 영조에게 배워라

  • Array
  • 입력 2010년 7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는 조선 후기의 국왕 영조가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게 얼마나 어려웠나를 잘 보여준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 신하들은 그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제2의 연산군’이 될 수 있다며 세손(정조)으로의 왕위 양위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인사권 등 국정의 주요 사안에서 세손을 소외시키는가 하면, 아예 정조 대신 다른 후계자를 세우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론의 서명선은 정통성 있는 세손을 제척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며 들고 나섰다. 1775년 당시 82세의 고령이었던 영조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서명선의 용기를 칭찬한 후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영조 재위 후반의 정국은 왕위 양위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얼마나 치열하며 이후의 역사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런데 영조의 업적 중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정조로의 양위는 그보다 26년 전의 ‘세자 대리청정’이라는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749년에 환갑을 앞둔 영조는 “국왕의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양위”라면서 세자에게 국정을 대리하게 했다. “세상의 일은 해도 해도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니, 내가 하다가 떠난 뒤에는 뒤에 오는 이가 다시 하게 마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찌감치 시작한 대리청정이라는 왕위 양위 작업은 그로부터 13년 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도세자와는 소통의 부재로 실패

1차적인 이유는 남을 믿지 못하는 영조의 성격과 세자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었다.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때문인지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드는가 하면 아픈 상태에서도 자신의 침상에 이불을 펴 놓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또 경연(經筵)과 같은 제왕학 학습과정을 유난히 강조했다. 조선 초기의 ‘호학군주’ 세종대왕과 같은 빈도(월평균 5회)로 경연을 개최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반면 세자는 부왕이 보기에 게으를뿐더러 학문보다는 무예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영조가 세자에게 무슨 책을 읽었고 누구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를 매달 자세히 적어서 제출하라고 지시한 일은 그런 불신에서 나왔다.

영조는 “결코 임금 노릇을 하지 않겠다”면서 대리청정을 맡겼지만 틈만 나면 스스로 나서곤 했다. 크고 작은 인사문제로부터 균역법 실시나 청계천 준천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정을 영조 자신이 주관했다. 세자가 하는 일이라곤 신하의 정례적인 국정보고나 지루하게 긴 상소문에 답을 내려주는 것뿐이었다. 가끔 세자가 의욕적으로 독자적 결정을 내리면 영조는 자신에게 가져와 보고하게 한 다음 반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국왕과 승계자 사이의 소통 채널의 부재였다. 영조는 스스로 “내가 소통(疏通)을 권하여 이루려 한다”고 선언했지만 재위 전반부까지는 그렇게 자주 열던 국정토론회의(경연)를 대리청정기에는 거의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세자가 누구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어떤 조치를 내렸는지 묻곤 했다. 세자를 불러 자신이 30여 년간 공들인 탕평이라는 대통합의 국정운영 방향을 잘 계승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그것은 세자의 불만과 저항감만 키웠다.

놀라운 점은 1762년의 ‘사도세자 사건’, 즉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다음 영조의 태도 변화다. 세자는 노론 독주체제를 견제하려는 듯 강경파의 공안정국 조성 시도에 “따를 수 없다”고 제동을 거는가 하면, 소론계 신하를 중용하려 했는데 그것이 결국 자신의 죽음을 부르고 말았다. 이후 영조는 손자인 정조에게는 아들과 정반대로 대했다.

그는 우선 세자와 달리 책 읽기를 좋아하고 묻는 족족 “메아리처럼 응답을 잘하는” 세손 정조를 예뻐했다. ‘영조실록’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특하다” “이보다 더 잘 대답할 수는 없다”는 영조의 칭찬이 그것이다. 영조는 또한 백성과 만나고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손자에게 보여주었다. 1767년 봄에 영조는 동대문 밖 전농동에 나가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는데 영조에 이어서 정조도 쟁기를 잡고 밀었다. 돌아오는 길에 운종가의 백성을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 일도 세자에게 해 주지 않았던 배려다.

세손 정조엔 칭찬으로 장점 살려

한마디로 영조의 칭찬 교육이 있었기에 정조라는 훌륭한 군주가 등장할 수 있었다. 영조는 손자의 장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가 하면 배려하면서 자립할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권력투쟁의 ‘도끼날’에 잘려나가지 않고 나라의 큰 기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믿고 지켜주었다.

이제 곧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가 시작된다. 리더십 승계의 실패는 비단 특정 당파의 실패일 뿐 아니라 곧바로 나라의 안정적인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최적의 후보자를 찾아 탕평책을 계승시킨 영조의 사례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두가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