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치영] 뉴욕 오는 한인 화가들의 필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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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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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에서 ‘볼펜 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일 씨(58)가 미국에서 화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미국으로 건너온 지 30년이 넘은 2007년이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그림 공부를 더 하기 위해 1976년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는 맨주먹이었다. 2년간 옷가게 창고 정리 같은 온갖 허드렛일로 등록금을 모았다. 뉴욕에 위치한 유명 아트스쿨인 프랫 인스티튜트에 간신히 입학했지만 방학 때마다 밤낮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가발도매상에서 무거운 가발을 등에 메고 지하창고로 날랐고 조명기구 공장에서 스탠드에 페인트칠을 하기도 했다. 10가지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1982년 어렵게 졸업은 했지만 미국에서 화가생활은 그에게 사치였다. 그를 알아주는 갤러리도 없었다. 작업실은 꿈조차 꿀 수 없었고 가족을 먹여 살릴 길도 막막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마다 옷가지를 차에 싣고 벼룩시장을 찾아다니며 좌판을 깔았다. 몇 시간씩 운전을 하며 장사를 하던 그는 브루클린에 가게를 내고 본격적으로 옷 장사에 나섰다. 이렇게 장돌뱅이 생활을 수년 했지만 그는 한순간도 작품에 대한 열정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선(線)이 좋아 볼펜을 고집했고 볼펜으로는 뭐든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고단했지만 볼펜을 놓지 않았다. 하루 10시간씩 화폭을 붙잡고 수십 자루의 볼펜이 닳을 때까지 숲이며 바다며 하늘을 맘껏 표현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세계를 만들어 가기를 20여 년. 그의 그림을 알아보는 뉴요커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를 뉴욕의 유명화가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2007년에 왔다. 뉴욕 퀸스 미술관이 그의 개인전을 열어줬고 뉴욕타임스는 그의 작품에 대해 ‘부드럽고 깊은 잉크 자국으로 본능을 유혹한다’고 호평했다. 이제 그의 작품들은 미국 미술대학 교재에 실릴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낯선 미국에서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는 그만이 아니다. 가로 세로 3인치(7.6cm) 나무판 캔버스로 유명한 설치미술가 강익중 씨(50). 고 백남준 선생이 제자로 인정한 그의 유학시절도 고단했다.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옷가게 점원과 야채가게에서 야채를 손질하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공부를 마쳐야 했다. 그가 3인치 나무판을 고안한 것도 뉴욕의 지하철을 타고 일을 하러 다니다 아무 때고 주머니에서 나무판을 꺼내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휘트니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청사, 뉴욕 지하철역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영상설치예술가 임충섭 씨, 조각가 한용진 씨, 프랫 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가 된 조각가 존 배 씨 등도 젊은 시절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인 예술가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뉴욕에 왔을 때만 해도 한인 예술가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정확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예술가들이 뉴욕에 온다. 하지만 참고 견디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일 씨는 자신이 미국에 올 때는 가슴에 비수를 하나 품고 왔다고 했다.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는 독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신용카드를 품고 오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신용카드 한도가 떨어지면 한국에 돌아가는 후배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뉴욕에서 성공하는 한인 예술가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신치영 뉴욕특파원 higgledy@dong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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