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소연]중력조차 감사한 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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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전인 2008년 4월 19일 한국 시간으로 오후 5시 반경 나는 카자흐스탄의 널따란 초원 위에 누워 있었다. 10일간의 우주비행, 갑작스러운 탄도궤도 귀환 덕분에 이겨내야 했던 높은 중력, 또 알 수 없는 어딘가에 떨어졌다는 불안감, 구조대가 아닌 선장 유리 말렌첸코가 직접 연 해치를 통해 안간힘을 쓰며 기어 나오던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를 지켜보던 현지 유목민….

이 모든 일에 대한 생각을 살짝 미뤄둔 채 한참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편안한 요람인 지구를 만끽했다. 드러누워 있던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당겨 주던 중력이 편안했고 오랜만에 맡는 흙냄새, 눈이 조금 부시긴 했지만 내리쬐는 햇볕도 너무 반가웠다. 그때만큼은 우리 셋 모두 그 편안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시간을 만끽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은 하필 우리가 탄도궤도로 귀환을 하게 되어 힘이 들었던 것이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행운이었다. 비행을 하기 전 훈련 시에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훈련을 한다. 발사 및 귀환 시에 일어날 모든 사항에 대해 배우고 훈련을 하므로 만일의 경우 탄도궤도를 통해 어렵게 귀환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배우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훈련을 받았다.

가르치는 교관이나 배우는 우리 모두가 이 같은 일이 아주 낮은 확률로 일어난다는 점을 알아서 훈련은 받지만 직접 경험하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 비행 6개월 전에 말레이시아 최초의 우주인 일행이 탄도궤도로 귀환했다. 낮은 확률의 일이 바로 전에 일어났다면 더더욱 내가 비행을 할 때 그런 일이 또 일어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찌 보면 공학도로서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고 우리는 경험했다.

탄도궤도 귀환 ‘위험한 행운’

귀환하는 동안 캡슐 내부에서 연기가 나서 잠시 동안 전력을 모두 꺼야 하는 상황까지 있었고 그동안에는 구출을 위한 신호조차 보낼 수 없었다. 임무 조종 센터에서는 우리를 찾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그 과정 동안 우리의 비행을 책임지는 선장은 너무나 침착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다. 심지어 자신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경력을 가진 나의 생각을 존중하고 중요한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공학도인 나의 의견을 완전히 수용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탄도궤도를 통한 귀환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행운이자 기회였다. 수십 년 훈련을 받으며 장기 체류 비행을 몇 번씩 해본 우주인도 이런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전투기 조종사의 이젝션 클럽(ejection club)처럼 탄도궤도 귀환 클럽(Ballistic landing club)이 있다며 클럽에 가입하게 됐음을 축하한다고 가슴 가득 훈장을 달았던 러시아 할아버지 우주인이 악수를 청했을 때는 영광스럽기까지 했다.

개인인 나의 삶에도, 내가 속한 여러 사회에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도 확률은 낮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항상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 비록 당시에는 죽을 만큼 힘든 일이더라도 우리는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더욱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이겨낼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지나고 나면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큰 병을 이기기 위해 백신을 맞고 가벼운 몸살을 겪듯이 우리가 더욱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어려운 일이 꼭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러시아 우주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지구는 인류에게 너무나 편안한 요람 같은 곳이라고 했다. 우주라는 곳의 불편함을 겪은 나로서는 지구가 인류에게 숨쉬는 공기를, 마실 물을, 그리고 중력과 함께 편안히 일하고 쉬는 장소를 주는 요람 같은 곳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한 요람에 누운 아기에게도 수많은 욕구와 불만, 어려움이 있듯 편안한 요람인 지구도 항상 편안하고 행복할 수만은 없다. 편안하지만 요람을 떠나 어른이 되고자 노력하는 아기의 모습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류인 우리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몸살앓는 한국 더 건강해지길

반만년 역사 속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때마다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든 과정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행운의 백신이었던 것 같다. 요즈음 뉴스를 접할 때면 대한민국은 참 수많은 어려운 일로 가득 찬 듯한 느낌이다. 이 모든 일이 더욱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비록 눈을 찔끔 감게 하는 간단한 주사가 아니라 하루 정도 몸살을 앓아야 하는 것일지라도 이겨내고 나면 큰 병을 이겨내게 만드는 백신이기를, 그래서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더욱 건강한 대한민국으로 다시 일어나길 기대한다.

이소연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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