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환수]낙화유수(落花流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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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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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시겠습니다.”

2003년 11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검정에 있는 대형 음식점인 하림각 연회장. 난생처음 보는 특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나같이 까만 양복에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연회장 안은 물론이고 바깥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꽉 메우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1000명은 돼 보였다. 이들은 50명 남짓 무리를 지어 상석에 앉은 한 노인을 향해 “제가 모시겠습니다”를 목청껏 외치며 큰절을 올렸다.

이날은 ‘낙화유수’로 더 잘 알려진 김태련 씨의 고희연이 열린 날. 당뇨가 있던 김 씨는 진작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회장님’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해 전국의 어깨들이 총집결했다. 중국의 삼합회와 일본의 야쿠자가 왔다는 말도 들렸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인텔리’ 주먹인 김 씨는 2006년 작고하기 전까지 생존해 있는 주먹 중 최고 서열이었다.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모으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된 그는 유지광의 오른팔로 1950년대를 휘어잡은 당대 최고의 주먹이었다. 유지광은 이화룡의 명동사단과 함께 광복 후 장안을 양분했던 동대문사단을 이끈 이정재의 사돈이자 후계자. 낙화유수란 별명은 당시로선 훤칠한 키(175cm)에 수려한 이목구비로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붙은 것이었다.

기자는 대부분 체육기자를 했지만 우연히 인연이 닿아 현장을 직접 취재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고희연 전후에도 여러 차례 만나 친분을 쌓은 김 씨는 “종로의 김두한을 미화하다 보니 동대문사단이 어둡게만 그려졌다. 또 당시 ‘협객’의 세계는 요즘 깡패와는 전혀 다르다”는 등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점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러면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지만 후회는 없어. 남은 생 동안 뒷골목 사회에 진정한 협객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떠나고 싶어. 그게 이정재 회장님과 동대문사단에 진 빚을 갚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자에게는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며 ‘24시간 터진다’는 전화번호를 주기도 했다.

기자는 대통령만큼 만나기 힘들다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도 세 번이나 만나봤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회장은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 같은 큰 행사가 있으면 빼놓지 않고 기자단을 찾아와 격려했다. 그러나 악수 한 번으로 끝나는 짧은 만남은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기자는 이 전 회장을 알지만 이 전 회장은 여전히 기자를 모를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인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영화 ‘싸움의 기술’에서 절정 고수인 오판수는 “내가 예쁜 걸 이제 봤느냐”는 다방 여종업원에게 “잘 보지 않으면 안 보이지”라고 말한다.

낙화유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온몸을 휘감던 흥분까지는 아니었지만 기자는 박찬호 이승엽과 차범근 황영조 감독 같은 슈퍼스타들과 오래 얘기할 기회도 가져봤다. 몇몇 스타와는 아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기자는 아주 행복한 직업이다. 역사의 현장을 지킨다는 거창한 사명감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 원하는 대단한 사람들과 쉽게 트고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말이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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