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민주주의에 앞서는 가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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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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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크리스마스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왠지 모두가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아이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고 서로 축복의 말을 나누는 계절이다.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지금 가장 긴요한 선물과 축복이 무엇일까? 나는 권력과 돈에 대한 강박관념, 곧 정치에 대한 집착에서의 해방과 인간적 긍지, 국민적 자부심의 회복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민주주의를 독재의 반대어로 단순화할 수 있었던 순진한 시절, 학생들은 최루탄 속에서 민주주의를 목마르게 외쳤고 다수의 시민도 동조했다. 지난 30, 40년 사이 민주화와 산업화는 발전을 이끄는 양대 구호였고 양쪽에서 다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우리는 이제 통일과 선진화라는 두 개의 다른 구호를 추가해 놓고 있다.

산업화에 성공했음은 틀림없고 경제적으로 우리는 이제 세계가 무시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도 성공했고 삶의 질과 국민적 긍지도 그만큼 높아졌는가? 민주화 투쟁에 젊은 날을 다 바쳤다는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가서도 폭력을 휘두르고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피의자의 처지에서 자살을 한다면 법치와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양보-포용하는 사회 만들어야

교육감이나 대학총장 선거에 억대의 개인 돈을 써야 하며 학생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명분아래 어린 싹에게 자기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길러주는 것조차 불법화하는 조례를 추진하는 교육감까지 있다니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선거제도는 이미 향기가 아니라 독을 품어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사익밖에는 안중에 없는 사람도 집단을 결성하여 결사적으로 반대 투쟁만 하면 심대한 국정사안도 차질을 빚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권력 행사를 시위자의 폭력과 동격에 놓고 이야기하는 무식하고 무책임한 언론의 횡포가 끊이지 않는 한 민주주의의 앞날은 밝다고 보기가 어렵다.

이제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자유선거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며 민주주의가 만병통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선거가 본래의 의미를 지니려면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의 의식 수준이 비등하게 높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오랜 과정에서 터득하고 전수해 왔던 지혜와 가치가 불문율로서 힘을 발휘해야 한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 정직, 나의 입장을 남의 입장과 바꾸어 놓고 느끼며 생각할 줄 아는 능력, 운명이나 신, 우연의 이름으로 불리는 초월적 힘에 대한 인정,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최대한으로 발휘해가는 투지와 용기 등이다. 그런 것 없이는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진 정치제도도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가장 실속 있게 작동하는 영국이나 스웨덴, 네덜란드가 아직도 왕국체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불행을 노정하지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있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나라는 다 공통된 기본 가치를 유지한다. 정직과 성실, 근검과 겸허가 창의성과 순발력 못지않게 좋은 결실을 가져오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보하고 포용할 줄 아는 능력은 격이 높은 시민의 공통점이다.

우리 전통에서도 그런 가치를 미덕으로 강조했다. 지금 정가에서는 자취도 찾아볼 수 없게 된 분수, 경우, 염치, 겸손, 자비와 연민, 양심, 양식은 인간을 금수로부터 구분하는 핵심 가치로 교육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것만 살아 있다면 홀로코스트 같은 독재와 약육강식의 광란 속에서도 신들러나 스기하라처럼 인간으로 살아남아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도 때로는 가능했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추악한 이기주의의 포장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평등, 도덕성, 인권을 소리 높여 외쳐대는 사람일수록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모르던 가난한 우리 조상이 지녔던 지혜와 미덕을 깡그리 팽개쳐 버리고 유아독존 식으로 남 위에 군림하려 든다는 사실이다.

감사하고 베푸는 국민 됐으면

분수없는 욕심이나 거창한 정치 구호의 위선에서 해방되어 밖의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감사할 일이 참으로 많고 무엇인가를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여지가 매우 많음을 알고 놀랄 것이다. 민족통일을 부르짖기 전에 우리 주변의 탈북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에게 따뜻한 식사나 선물 한 가지라도 대접하거나 홀몸노인을 방문해 보자. 목청 높은 정치인이나 요행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결코 맛볼 수 없는 인간적 긍지와 마음속의 훈훈함이 솟아날 것이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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