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연수]하이브리드 정책시대

  • Array
  • 입력 2009년 12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영리병원 도입이 다시 미뤄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15일 영리병원에 대해 보고받은 뒤 “시간을 갖고 충분히 논의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우리 건강보험제도에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미국식 헬스케어가 반드시 좋은 건 아니지 않느냐”며 “아픈데 차별까지 받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느냐”고도 했다. 아무래도 ‘도입’보다는 ‘충분한 논의 후’에 더 무게 중심이 있는 듯하다.

현 정부는 출범 이전부터 서비스산업 선진화와 의료분야 규제 개혁을 추구해왔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이번 영리병원 유보 발언은 다소 뜻밖이다. 영리병원은 의료산업을 발전시키고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서 오는 긍정적 효과와, 의료에 시장원리가 도입됨으로써 나타날 ‘상대적 박탈’이라는 부정적 효과 중에서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수만 명의 일자리가 생기고 의료서비스가 다양해지더라도, 만약 돈 없는 사람이 지금 같은 의료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된다면 위정자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카드다. 의료는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라서 생명과 건강이라는 인간의 기본권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이 점을 꿰뚫어 보고 5년에 걸친 논란을 일단 잠재운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이것뿐이 아니다. 올해 이슈가 된 사안들은 우파 정부의 정책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야간 학원교습 금지, 외고 죽이기, 대기업슈퍼마켓 규제, 정부 기관들을 동원한 물가 잡기 등…. 오죽하면 “4대 ‘공공의 적’이 있는데 바로 사교육비, 휘발유값, 통신비, 우유값이다”라는 말이 시중에 나왔을까.

올 하반기부터는 아예 정책 기조를 ‘친서민’으로 정했다. 우파 정부가 친서민을 강조하다니 좋게 보면 이념을 초월한 실용주의고, 나쁘게 보면 원칙도 일관성도 없는 포퓰리즘이다. 현 정부의 정책들이 얼마나 성공하고 얼마나 실패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떤 것은 조급하고 과격해 보이고, 어떤 것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어떤 정책들은 서로 충돌한다. 분명한 건 과거의 이념적 잣대로 보면 이질적인 것들이 마구 섞여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브리드 정책의 결정판은 ‘녹색성장’이다. 과거 좌파나 환경단체의 전유물이던 온실가스 감축과 환경보호 운동에, 성장이라는 우파의 전략을 조합해 ‘녹색성장’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만들었다.

정책의 잡종화는 유럽 선진국에서는 이미 익숙하다. 모든 정책에는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시대와 나라 사정에 맞는 정책의 조합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필요한 건 실제 사례와 과학적 근거다. 서비스산업과 의료복지도 앞서간 나라들의 사례를 면밀히 비교검토하면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타계한 ‘현대경제학의 아버지’ 폴 새뮤얼슨은 베스트셀러 ‘이코노믹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 경제학은 증거로부터 도출한 사유를 가슴에서 끌어낸 목적과 결합시킴으로써 최선의 기여를 할 수 있다.”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영혼이 없이 경제적 효과만 강조하거나, 실질적 근거 없이 이데올로기만 주장하는 집단은 정당이든 경제, 사회단체든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국민 모두가 충분한 의료혜택을 받으면서 의료산업을 발전시키고 외화도 벌어들일 수 있는 묘안이 나오기를 바란다.

신연수 산업부장 yssh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