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동아방송 산증인들 ‘그 때 그 시절’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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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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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오락취급 받던 시절, DBS는 저널리즘 도입”

방송계 1980년 통폐합 체제후 정체… 미디어계 새바람 절실

“동아방송은 독창적이고 개방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한국 방송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었죠.” 안평선 한국방송인회 상임부회장, 최창봉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왼쪽부터)가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동아방송의 역사와 의미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김미옥 기자
“동아방송은 독창적이고 개방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한국 방송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었죠.” 안평선 한국방송인회 상임부회장, 최창봉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왼쪽부터)가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동아방송의 역사와 의미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김미옥 기자
“한국에 방송 저널리즘을 처음 도입한 동아방송이 폐방되지 않고 계속 유지됐다면 아마도 사실에 입각한 방송 저널리즘이 지금 활짝 꽃피었을 겁니다.”(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

방송계의 원로인 최창봉 전 MBC 사장(전 동아방송 국장대리)과 언론학자 강 교수가 동아방송 폐방 29년(11월 30일)을 계기로 안평선 전 동아방송 PD의 사회로 대담을 가졌다.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들은 2시간 가까이 동아방송의 선구자적 역할을 회고하고 한국 방송의 앞날을 이야기했다.

▽안평선=동아방송은 1963년 4월 25일 개국하면서 다른 방송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과 아이디어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는데요. 개국의 의미를 짚어 주신다면….

▽최창봉=동아방송은 태생부터가 달랐습니다. 4·19혁명 이후 민주주의가 부활했던 때 민주당 정권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죠. 당시 최두선 동아일보 사장과 김상만 전무는 방송을 준비하던 저에게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수 있게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민족 민주 문화라는 동아일보 창간 정신에 맞게 방송을 만들라는 걸로 이해했습니다. 김 전무는 또 “방송으로 돈 벌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고도 말했어요. 처음 1년간은 뉴스에 광고를 붙이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강현두=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앞장서고 자유당 정권 때 반독재투쟁을 이끌었던 동아일보의 저널리즘 정신을 동아방송이 그대로 이어간 것이었습니다. 이 정신이 뉴스는 물론 드라마 음악 등으로 표출되면서 격조 높은 방송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죠.

▽안=정권은 동아방송 개국 1년 뒤 프로그램 ‘앵무새’의 내용이 내란 선동이라며 최창봉 씨 등 간부 6명을 구속했습니다. 당시 정권과 동아방송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최=동아방송이 개국할 때 동아일보 사시를 바탕으로 동아방송 주지(主旨)를 세 개 만들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유와 정의 편에 서며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한다’였습니다. 당연히 정권과 불화를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동아방송 18년은 정권과의 대립의 역사였습니다. 신문과 마찬가지로 광고 탄압도 받았고 1980년 언론통폐합도 사실상 비판 정신이 투철한 동아방송을 첫 번째로 겨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동아방송은 독창적 편성으로 다른 라디오 방송을 압도했는데요.

▽최=당시 라디오 방송은 오전 7시대, 낮 12시대, 오후 7∼8시대만 청취율이 높았습니다. 나머지는 ‘죽음의 시간’이라고 불렸고 심지어 오후 2∼5시에는 클래식음악만 틀어주기도 했습니다. 동아방송은 죽음의 시간대를 적극 공략했죠. 오전 8시 코미디언 구봉서 씨의 ‘이거 되겠습니까’, 오후 3시 국내 최초의 디스크자키였던 최동욱 씨의 ‘3시의 다이얼’, 오후 10시대 김세원 씨의 ‘밤의 플랫폼’, 심야프로그램인 ‘0시의 다이얼’이 대표적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조사한 청취율을 보면 수도권과 충남·강원 일부에 나갔던 동아방송 청취율이 전국 네트워크를 가졌던 방송보다 더 높았어요.

▽강=동아방송은 개방적 방송이었어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1967년에 귀국했는데 한국에 이런 방송이 있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당시 방송은 스튜디오에 갇혀 있었는데 동아방송은 마이크를 들고 현장으로 나갔어요.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사실을 얘기하도록 한 거죠.

▽최=당시 방송 뉴스는 형식적이었어요. 5∼10분 정도 통신사의 원고를 그냥 읽는 정도였죠. 따라서 방송기자로 훈련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동아방송은 뉴스’라는 인식 아래 뉴스를 강조했습니다. 기자들에게 녹음하고 편집하는 법을 가르친 뒤 현장으로 내보냈습니다. 이렇게 만든 게 ‘DBS 리포트’였죠. 이후 15∼20분짜리 와이드 뉴스 ‘라디오 석간’을 만들었습니다.

▽강=당시엔 방송 저널리즘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미국도 30분짜리 방송 뉴스가 생긴 게 1963년이었어요. 한국에선 ‘방송=오락’이란 인식이 더 강했죠. 그런 시기에 뉴스를 화두로 삼고 방송 저널리즘으로 가득한 방송을 만든 건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입니다. 신문사가 운영하는 방송이라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안=동아방송은 진행자의 개성을 강조하는 퍼스낼러티 시스템을 구현하고 방송 직종 간 벽도 허무는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최=당시 마이크는 아나운서만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아방송은 기자에게도 마이크를 들게 했죠. 또 여기 배석하셨지만 최동욱 씨는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면서 혼자서 녹음 선곡 진행을 다 맡았어요. 제가 개국 1년 뒤인 1964년 미국 ABC 라디오 방송국을 찾아갔는데 거기 편성국장이 “우린 아나운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귀국 후 아나운서를 불러 놓고 “미국 상황이 이렇다, 너희들도 기획하고 제작하는 법을 배워라”고 했죠.

▽안=혁신적이고 정권 비판적이었던 동아방송은 결국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방되는데요. 이후의 변화와 현재 방송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강=한마디로 말하면 비판적이고 정권과 각을 세웠던 동아방송의 언론 기능을 뺏은 겁니다. 한국 방송계는 1980년 인위적인 통폐합 체제에 안주해 경쟁도 없고 정체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미디어계의 변화는 통폐합 체제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과거 동아방송이 방송저널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최=통폐합 때 정권이 내세운 명분은 상업방송의 저속성이었죠. 하지만 동아방송은 방송윤리위원회가 매달 방송 심의 결과를 발표할 때 거의 지적받은 게 없었습니다.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지금 동아방송의 전통을 잇는 새로운 방송이 나왔으면 합니다.

▽안=과거 동아방송 애청자들도 새로운 동아방송을 보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안평선 씨:
―1937년 경기 광주 출생
―1963∼1980년 동아방송 PD
―1981∼1995년 KBS 라디오 드라마 부장, 춘천총국 국장
―1997년 경동 케이블TV 사장
―2002년∼현재 한국방송인회 상임부회장

:최창봉 씨:
―1925년 평북 의주 출생
―1963∼1971년 동아방송 국장대리
―1980∼1985년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1989∼1993년 MBC 사장
―2002년∼현재 한국방송인회 이사장

:강현두 씨:
―1937년 평남 평양 출생
―1961∼1963년 KBS PD
―1986∼2001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01∼2002년 한국디지털위성방송 대표
―2002년∼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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