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몸통엔 무능, 깃털엔 펄펄

  • Array
  • 입력 2009년 11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올해 1월 12일(월요일)자 석간 헤럴드경제에는 ‘수뢰로 수감 중인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상납 받은 그림이 매물로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전 전 청장의 부인 이미정 씨가 고 최욱경 화백의 ‘학동마을’을 내놓은 것. 이 씨는 말했다. “한 조간신문에 마치 남편이 K화랑의 세무조사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그림을 받은 것처럼 보도됐다. 분통 터진다. 그 그림은 2007년 3월 한상률 (당시 국세청) 차장 내외와 부부 동반으로 모 식당에서 식사하던 중 한 씨 부인이 내게 준 거다. 그 자리에서 한 차장은 인사 청탁을 했다.”

국세청장들의 상납-청탁 의혹

장문의 기사였고 진술은 세밀하고 구체적이었다. 이른바 ‘그림로비’ 의혹 사건의 시작이었다. 매각 의뢰를 받은 홍혜경 가인갤러리 대표는 안원구 당시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의 부인으로 전 전 청장 부인 이 씨와 친한 사이였다.

전 전 청장과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은 즉각 “그런 일 없다” “그런 그림을 본 적도 없다”며 부인했다. 사흘 후인 15일 한 청장은 사임 의사를 밝혔다.

안 씨는 전 전 청장 아래서 대구지방국세청장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하는 바람에 부러움과 시샘을 샀지만 2008년 정권교체 후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부인 홍 씨가 그림로비 사건 발설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면서 본부대기 발령까지 받았다. 이후 그는 국세청에서 인사의 걸림돌이 됐고 조직 안팎에서 눈총을 받아왔다. 그의 사퇴를 종용하는 국세청 감찰부서 간부의 통화 녹취록이 지난달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던 안 씨가 사건 10개월 만인 21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기업으로부터 ‘세무조사가 잘 마무리돼 고맙다’고 인사를 받으면 “내 처가 운영하는 화랑이 힘들다. 도와다오”라고 부탁하는 방법으로 값비싼 미술품을 사게 했다는 혐의다. 이는 정말 간단치 않은 수사다. 기업이 안 씨 청탁 때문에 작품을 샀다 해도 검은돈으로 지불할 이유가 없다. 회계처리만큼은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 따라서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구속이 가능할 만큼 혐의를 입증했다니 검찰의 수사 의지와 역량이 놀랍다. 다만 찜찜한 것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뇌물을 줬다”는 진술을 받아내기 힘들다는 점이다. “안 불면 죽이겠다”고 압박해도 될까 말까다.

반면 이 사건의 몸통 격인 ‘전 국세청장끼리의 그림로비’ 의혹 수사에서는 진전이 없다. ‘학동마을’은 2004년 K화랑에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 따라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이 그림의 거래 및 보유 경로만 파악하면 상납설의 진위를 금방 밝힐 수 있는데도 지지부진이다. 10개월 수사 결과라고 믿기 힘들 정도. 깃털 격인 ‘국장급 수뢰’ 의혹 수사에서 펄펄 나는 모습과 영 딴판이다.

머나먼 법집행 선진화

최근 홍 씨가 “한 전 청장이 ‘정권 실세에게 10억 원을 갖다 주려 하니 3억 원을 만들어 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했다”는 등 폭로전을 시작해 사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졌고 검찰도 수사를 마냥 미루기는 힘들게 됐지만, 그래도 지켜볼 일이다. 일선 검사들은 ‘윗선에서 안 씨 수사에 왜 그리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필자 역시 검찰 수사가 왜 몸통 아닌 깃털을 주로 겨냥했는지 내막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알고 있다. 현실과 맞지 않는 법체계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은 법을 어기고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미운 사람을 찍어 죽일 수 있으며, 누구나 권력 앞에 알아서 기던 시절이 있었다. 선진화란 준법이 가능하도록 법체계가 유지되고 범법은 예외적인 일이 되며 국민이 권력의 자의적인 법집행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일 것이다. 그동안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는 놀라운 발전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보면서는 ‘어떤 부분에서는 참 진전이 더디다’는 생각만 든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