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침묵의 카르텔 깬 이계진 의원의 소신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10일 03시 00분


한나라당 내 친박(친박근혜)계인 이계진 의원이 세종시 수정안 논의를 위해 구성되는 당 차원의 특별기구에 참여하겠다고 어제 밝혔다.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 의원은 “당직자로서 당연히 논의기구에 참여하겠다. 선거 때 맺은 인연 때문에 박 전 대표가 무슨 말을 하든 따라야 한다면 당직자 자격이 없는 것 아니냐”는 말도 했다.

이 의원의 소신 발언은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이 “특별기구가 구성돼도 친박 의원들이 참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은 직후에 나왔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원안 추진을 강력히 주장했고, 특별기구 구성에 대해서도 “나와 상의할 일이 아니다”며 부정적 의사를 나타냈다. 친박 내에서는 세종시 수정안 논의에 불참한다는 암묵적 가이드라인이 정해진 상황이다.

이 의원의 태도 표명은 친박계인 이성헌 사무부총장이 수정안 추진에 불만을 표시하며 당직을 사퇴한 것과도 대비된다. 이 사무부총장처럼 당의 방침과 소신이 달라 당직을 사퇴하는 것은 정치인으로 하나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계파 구성원들이 보스 의견에 한목소리를 내며 당 내부의 의견 조율마저 거부한다면 당을 함께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친박 사이에서도 세종시 원안 수정을 비판하는 박 전 대표의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는 “잘못된 법은 바꿔야 한다는 게 소신”(김무성 의원)이라는 의원도 있었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수정 반대론의 깃발을 들어올리자 50여 명의 친박 의원은 순식간에 일절 다른 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에 줄을 섰다. 친박계가 이처럼 경직된 조직문화를 갖고 집권했을 때 어떤 국정운영 방식을 보여줄지 걱정스럽다. 민주주의의 후퇴가 현실화되지 않을까.

이 의원은 “수정론이 충청을 홀대하고 나라를 망치자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세종시에 엄청난 세금을 쏟아 부어야 하는데, 세금 낸 국민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충청권 표심만 의식해 국가적 효율성 같은 근본 문제를 외면하려는 당 안팎의 포퓰리즘을 극복하고 국민을 먼저 생각하자는 당연한 문제 제기가 새삼 신선하게 들린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수정안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청와대 역시 수정론에 공감하고 있는데도 ‘당론은 원안 고수’라며 한동안 남의 집 얘기하듯 했던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와 안상수 원내대표도 느끼는 바 있어야 한다. 친이(친이명박)계 의원 가운데 “세종시 원안은 잘못됐지만, 정치적으로 어려워질 수 있으니 일단 원안대로 가자”는 일부 상황추수주의자는 이 의원을 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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