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지금 正名을 떠올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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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일 0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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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집권한 신군부는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급조했다. 그들은 국정(國政) 슬로건으로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었다. 민주화 열망을 물거품으로 만든 정치군인들이 당명(黨名)에 민주와 정의를 넣은 것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공공요금 인상을 ‘현실화’라는 표현으로 보도하라고 언론에 강요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도 이름과 실체의 괴리가 컸다. 창당 주도 세력은 정당이름과 딴판으로 집권여당 사상 가장 폐쇄적인 좌파 운동권 사고(思考)에 빠져 있었다. 걸핏하면 언론중재위원회 신청과 법정 소송을 남발하고 정부기관 기자실을 대못질한 언론정책을 그들은 ‘취재지원 선진화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독재체제를 함께 비판한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쓴 소설 ‘1984’는 전체주의 사회의 언어 왜곡을 잘 보여준다. 주민 사상통제를 맡는 부처명은 애정성(省)이었다. 보도와 예술 주무 부처는 진리성, 집단 강제수용소는 쾌락수용소로 불렸다. 집권당의 구호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無知)는 힘’이었다.

언어의 뒤틀림을 바로잡는 일은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세계의 번듯한 나라치고 우리처럼 이 폐해가 심한 나라는 드물다. 언어의 왜곡은 대체로 민주화 이전에는 권위주의 정권, 민주화 이후에는 좌파세력에서 두드러졌다.

메이저신문 광고주 협박사건을 일부 세력은 ‘언론 소비자운동’이라고 주장했다. ‘광고 불매운동’이란 모호한 표현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최근 서울중앙지법은 이를 주도한 김성균 씨에게 공갈 및 강요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면서 “피고인의 행위는 피해자의 의사결정 및 의사실행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협박에 해당한다”고 못 박았다.

요즘 논란이 뜨거운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는 약칭을 통한 상징 조작 사례다. 노무현 정권은 행정도시가 아니라 행복도시로 약칭을 정한 뒤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철저히 정략적 목적으로 추진된 희대의 포퓰리즘 정책에 행복도시란 멋진 이름을 붙임으로써 앞으로 불러올 국가적 후유증을 숨겼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 오용(誤用)·남용되는 대표적인 단어는 이른바 ‘진보’다. 신중섭 강원대 교수는 “역사의 목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생각하는 진보의 개념이 다른데 전자(前者)를 보수, 후자를 진보라는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폭력시위를 광장민주주의라고 하면서 투표에서 잃은 것을 길거리에서 줍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좌파 중에도 극좌인데 이런 행태를 어떻게 진보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세습전제(專制) 인권말살 체제인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자칭하고, 그런 북한 정권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진보를 참칭하는 것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언어의 혼란과 왜곡은 이성적 판단 대신 거짓선동이 활개를 치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를 막으려면 공자가 언급한 뒤 동양 선비사회에 내려온 정명(正名·말의 개념을 바르게 함)의 가치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은 존중해야 하지만 그 한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우리 헌법 이념을 넘어설 수 없음도 분명히 해야 한다. 좌파든 우파든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세력이 발호할 수 없는 풍토를 정착시켜야 말 그대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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