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시장경제를 흔들려는 잡음들

  • 입력 2009년 10월 13일 20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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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앞 사람의 큰 덩치에 가려 화면이 잘 안 보이는 수가 있다. 서서 보면 잘 보인다. 그렇다고 모든 관객이 일어서면 어떨까. 다리만 아프다. 개별적 선택과 전체 선택의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 이런 현상을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고 부른다. 경제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다. 근검절약은 훌륭한 덕목이지만 전 국민이 절약하면 수요 위축으로 불황에 빠진다. 풍작은 좋은 일이나 전국에서 마늘농사가 너무 잘되면 마늘을 재배하는 농민은 밭을 갈아엎는다.

미시적 합리성과 거시적 오류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생 과정에서도 구성의 오류가 작동했다. 개별 금융회사는 건건이 담보부동산의 시가를 따져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상환에 문제가 생기면 담보물을 팔아 청산하겠다는 생각에서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 집값에 거품이 끼었고, 어느 날 거품이 꺼지면서 담보가치에 문제가 발생하며, 수백만 채의 주택이 동시에 매물로 나온다면? 집은 안 팔린다. 금융회사들은 연쇄부도 위기를 맞는다. 미시적 차원에서의 합리성이 거시 수준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또 예전 위기에 맞춰 보완된 규제는 새로운 위기를 막는 데 무력하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의 닷컴주 버블 후에 마련된 건전성 보완장치는 2008년 주택시장 거품을 막는 데 실패했다. 이 때문에 조지 쿠퍼 박사(영국 얼라인먼트 인베스터스 사장)는 “금융위기 재발을 막으려면 주택시장 거품을 살피는 데 머물지 말고 그 뿌리에 있는 금융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앙은행의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감독원 등 정부의 감독청은 은행, 보험, 증권 등 개별 금융사의 재무건전성을 살피는 미시 수준에서 잘 작동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통화가 지나치게 주입돼 자산시장에 거품이 끼고 있지 않은지 거시적 차원에서 감시해야 하며 이는 중앙은행의 몫이라는 것.(‘민스키의 눈으로 본 금융위기의 기원’)

이번 위기로 ‘적어도 금융시장에서는 자유방임주의를 주창하는 신고전학파의 이론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금융감독시스템 구축작업이 국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주요 20개국(G20)이 스스로 설정한 주요 과제이기도 하다.

도덕적 해이 문제도 간단치 않다. 부실 금융사에 재정이 투입될 경우 소유권을 박탈해야 한다. 경영진에 엄중한 책임을 묻고, 그들의 평상시 보수체계도 단기 성과가 아니라 장기 이익과 연계시켜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장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고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자산거품을 배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봉급생활자, 예금자의 주머니를 털어 금융회사, 과도차입 투자자 등 ‘위기의 주범’들을 돕는 괴상한 결과를 가져온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난제(難題) 중 난제다.

보완해야 할 것, 수호해야 할 것

이처럼 손봐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이를 기화로 시장경제시스템 전체를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다. 문제가 발생한 곳은 금융시장뿐이다. 상품시장, 국제무역, 산업정책 등에서는 여전히 ‘시장의 효율, 민간의 창의와 활력’ 담론의 설득력이 압도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고전학파에 맞서는 폴 크루그먼, 로버트 실러 등 케인스주의자들도 이견이 없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위기를 빌미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자체를 공격하고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관찰되고 있다는 점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제 체제에 내재한 위기의 가능성이 다시금 제기됐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보호무역주의자들이나 기업경영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진영에서 “그것 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도 있다. 어이없고 황당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경계해야 할 잡음들이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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