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묻지마 예산’ 8624억 원 누가 어디에 쓰나

  • 입력 2009년 10월 6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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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때 정상문 씨가 청와대 살림을 담당하는 총무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 원을 횡령한 사실이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청와대 감사원 국회 등 어디도 정 씨의 비리를 그 전에 잡아내지 못했다. 정 씨가 박 씨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더라면 끝내 적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세금을 낸 국민에게 12억5000만 원은 피와 살 같은 돈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와 법사위는 지난달 국세청 법무부 감사원에 대해 특수활동비를 제한적으로나마 공개하도록 하는 시정요구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2008 회계연도 결산안에는 ‘특수활동비 공개’ 대신 ‘부적절하지 않게 잘 쓰라’는 하나 마나 한 당부만 붙어 있었다. 여야 의원 대부분은 안건이 통과되고 며칠 후에야 내용이 바뀌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국회 주변에서는 특수활동비를 많이 쓰는 권력기관이 예결위에 로비를 벌여 국회의 감시를 저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임위가 받아낸 정부 부처의 공개 약속을 예결위가 백지화한 것은 예산 및 결산 심의 권한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특수활동비는 정보 수집이나 사건 수사 등 보안 유지가 중요한 국정수행 활동에 직접 사용되는 경비를 말한다. 공무원이 국민 세금을 타낸 뒤 영수증도 없이 ‘어디에 얼마를 썼다’는 확인서만 제출하면 끝나는 ‘묻지마 예산’이다. 흔히 ‘판공비’라 불리는 업무추진비와는 다른 별도의 예산으로, 각 부처는 예산 편성부터 비공개로 한다.

백용호 국세청장은 국회 기획재정위에 ‘본청과 지방청의 월별 특수활동비 집행액을 공개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금액은 연간 10억 원 정도로 각 부처와 위원회 및 국회의 올해 특수활동비 총액 8624억 원의 극히 일부다. 최소한의 공개나마 약속한 법무부의 279억 원과 감사원의 43억 원을 합쳐도 전체 특수활동비의 3.8%에 불과하다. 국가정보원의 4860억 원 등 나머지 8300억 원가량은 누가 어디에 쓰는지 납세자들은 알 길이 없다.

비공개가 관행이었던 특수활동비 역시 투명성이 더 높아져야 한다. 공개 수준과 방법은 국회가 정하면 된다. 특수활동비 지출 기관들이 떳떳하다면 집행 내용을 공개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야가 공동으로 감시제도를 운용하는 방안도 추진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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