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재범 한국 비하’ 논란이 걱정되는 이유

  • 입력 2009년 9월 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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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에서 자란 그에게 한국은 낯설었다.

가수가 되겠다고 정든 학교와 가족을 등지고 한국을 찾은 18세 청년은 외로움과 고단함을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거칠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에겐 모국어인 영어로 “한국이 역겹다(Korea is gay)” “한국인이 싫다(I hate Koreans)”고.

그로부터 4년 후 인기 그룹 ‘2PM’의 리더로 아이돌 스타가 된 박재범(22)은 그 옛날 친구와 나눴던 대화 내용에 발목이 잡혀 연예 활동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

그가 2005년 미국의 소셜네트워킹사이트인 ‘마이스페이스’에 남긴 일련의 한국인 비하 발언이 지난 주말 인터넷에 올라온 후 온라인 공론장은 그의 국내 연예 활동을 허용할 것이냐를 놓고 연일 들끓었다.

그는 재빨리 “철이 없고 어려 모든 잘못을 주위 상황으로 돌리는 실수였다”며 고개를 숙였고 소속사인 JYP도 공식 사과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보다 더 원색적인 발언이 발굴돼 ‘재범어록’으로 떠돌았고 포털에서는 ‘2PM 활동중지 서명운동’과 ‘2PM을 용서하자’는 움직임으로 들썩였다. 결국 박재범은 논란 발생 4일 만인 8일 2PM 탈퇴를 선언했다.

최근 포털의 급상승 검색어 ‘재범 한국 비하’를 여기서 언급하는 이유는 재미교포 연예인의 애국심을 논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 이야기라면 인터넷에 차고도 넘친다.

기자가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친교 사이트에서 주고받은 사적인 글이 공론장을 달구는 최대 이슈가 됐느냐는 점이다.

박재범이 ‘한국인이 싫다’고 털어놓은 공간은 몇몇 지인을 위한 친교 사이트였다. 모두가 듣고 있었다면 결코 내뱉지 않았을 적나라한 속내는 몇 년이 지난 후 누군가에 의해 내밀한 공간 밖으로 드러났고 곧바로 ‘인기 스타의 한국 비하 발언’이라는 뉴스로 터져 나왔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경계를 간단히 허물어뜨리는 디지털 미디어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디지털로 한 번 기록된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겹겹의 잠금장치를 둘러놓아도 비밀을 보장할 수는 없다. 전파 속도도 매우 빠르다. 동아닷컴이 추적한 바로는 문제의 발언이 5일 새벽 ‘디시인사이드’에 올라와 뉴스 사이트의 보도를 거쳐 소속사의 공식 사과로 이어지기까지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공인’과 ‘알 권리’ 논리로 사생활 침해가 쉽게 정당화되는 유명인이 자신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무심코 남겨 놓은 속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장 난 시한폭탄과도 같다. 유명 인사가 개인 미디어에 올린 사적인 글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증폭돼 메가톤급 이슈가 되는 현상은 더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일상이 돼버렸다. 어느 블로거는 이를 두고 ‘사소함의 사회화’ ‘사소한 일상의 과장’이라는 해석도 제기한다.

인터넷은 수많은 장밋빛 전망 속에 등장했다. 하지만 공동체와 공론장 복원이라는 기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제는 외면한 채 소모적인 논쟁에 집단적으로 한눈을 파는 난장(亂場)이 지금 온라인 세계의 실상이다.

말이 곱지 못했던 연예인의 퇴출 여부보다는 정보기술(IT) 강국의 하드웨어를 이렇게 활용할 수밖에 없는 척박한 뉴미디어 문화에 대한 반성이 ‘재범 한국 비하’ 논란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진영 인터넷뉴스팀 차장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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