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장자연이 박연차를 만났다면

  • 입력 2009년 3월 30일 02시 59분


분명 인터넷 중독 및 TV 과다시청으로 인한 치매성 과로 탓일 거다. 장자연 리스트와 박연차 리스트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인이 악녀 역할로 등장했던 ‘꽃보다 남자’야말로 KBS가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줌으로써 공영방송의 역할을 ‘지대로’ 한 흔치않은 드라마라고 보는 사람이다.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본질은 정권의 부패

어쩌면 박 씨가 19년 전 연예인 히로뽕 성매매로 처벌받은 전력 탓인지도 모른다. 한 국회의원이 망치로 박 씨 집 장롱을 치며 후원금을 요구하자 아예 도끼로 장롱을 부숴버리고는 더 큰돈을 보내줬다는 ‘싸나이’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고인이 생전에 박 씨를 만났더라면 안타깝게 목숨을 끊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망상이 치민다. 노무현 전 대통령 ‘빽’에다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고 믿는 박 씨가 힘없고 나약한 신인 여배우 하나 못 도와줬겠는가.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두 리스트를 대한민국 상류층의 섹스스캔들과 부패스캔들이라고 정리했다. 굳이 구분할 것도 없다. 나는 두 사건의 본질이 노무현-이명박 정권의 부패라고 본다. 세계은행은 사적 이익을 위해 공직을 남용하는 것을 부패로 규정했다. 박 씨는 가진 자원이 돈밖에 없어 ‘돈질’로 권력을 움직여 사익을 취했다. 장자연 역시 자신이 지닌 유일한 자원으로 ‘국민의 재산’인 전파권력을 움직이는 데 동원됐을 것 같다. 여자는 박 씨 같은 정치권력의 뒷심이 없어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남자는 진실을 주장함으로써 끝까지 사익을 챙기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특히 박 씨는 도덕성을 코에 걸고 집권한 세력의 도덕성이야말로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대만의 노무현’으로 알려졌던 천수이볜 전 총통은 부패혐의로 수감 중이다. “아내가 나 몰래 돈을 해외로 빼돌린 건 잘못”이라면서(도) 자신은 정치적 희생자라고 강변한다. 2005년 ‘깨끗한 손’을 내걸고 집권한 알바니아 중도우파 정권에선 최근 문화부 장관이 여성 구직자에게 “채용해줄 테니 벗어보라”고 한 몰래카메라가 전파를 타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는 이제와 측근들에게 “정치하지 말라”고 훈수한다. 그래도 자칭 ‘민주진보양심세력’은 또 선거에 나설 것이다. 도덕성만 안 내걸면 다행이다.

현 정권 곳곳에 도사린 부패 유혹

정권마다 반(反)부패를 맹세해도 왜 근절되지 않느냐고 통탄할 것도 없다. 부패는 고대 이집트에도 있었을 만큼 권력이 있는 한 존재했다. 네이시 모칸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교수는 49개국 9만 명을 조사 분석한 2004년 논문에서 나라와 국민의 특성에 따라 부패 가능성이 좌우된다고 했다. 대체로 권위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국가일수록 부패할 소지가 높다. 1950∼95년에 정변 또는 전쟁으로 민주주의가 중단된 경험이 있으면 부패의 위험성은 높아진다. 이 연구가 맞는다면 우리나라는 부패에 각별히 조심해야 할 체질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회의에서 윤리를 강조하면서 주마가편(走馬加鞭·달리는 말에 채찍질)이라고 했다. 아직은 잘한다고 믿는 모습인데 권력의 속성에는 자기기만이 포함된다. 이 정부는 부패에 더 취약한 DNA임을 뼈에 새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강부자(강남 땅부자) 정권’으로 시작한 원죄가 있는 데다 대통령은 노건평 씨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형님을 모시고 있다. 대통령의 신임을 업은 실세 차관들은 사조직처럼 끼리끼리 따로 모여 정보 교환까지 한다. 더욱이 정부가 커지고 규제라는 이름의 정부 입김도 커질수록 부패의 소지는 늘어난다는 게 부패에 관한 숱한 연구의 일치된 결론이다. 경제위기 극복 명목으로 재정지출이 커지고 공공사업이 늘어날수록 ‘고소영(고대·소망교회·영남) 출신’을 겨냥한 부패유혹도 짙어질 수 있다.

정부 역할이 확대됐던 대공황 시절 뉴딜정책이 미 국민의 지지를 받은 데는 부패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의지가 큰 몫을 했다. 재정 빼돌리는 공공의 적을 없애야만 재선이 가능하다는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작용했다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다.

정치적 계산이라도 좋다. 재산 다 기부하고 퇴임 후엔 집 한 칸밖에 안 남을 대통령이 영원히 부자로 사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경제에서도 득점력이 떨어지는 판에 ‘보수는 썩었다’는 고정관념까지 다시 확인시켜준다면 대한민국도, 보수정권도 미래가 희미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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