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각자도생’의 시대정신

  • 입력 2008년 7월 17일 22시 01분


오래된 썰렁한 유머 하나. 아버지와 아들이 대중탕에 갔다. 탕 안에서 “어 시원하다”는 아버지만 믿고 따라 들어갔다 델 뻔한 아들이 말했다. “세상에 믿을 × 하나 없네.”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도 못 믿겠고 사계의 전문가들도 죄 딴말만 한다. 국회의원부터 노조, 노숙인까지 법과 제도를 능멸해 대도 정부는 엄포만 놓다 만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 뺨치는 권위로 대북 독점사업을 해 온 대기업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외부 전화선부터 끊고 계속 장사를 했다.

정부도, 전문가도 못믿을 판

실패국가의 가장 큰 특징이 합법적 공권력 독점의 상실이라는 ‘포린폴리시’지의 정의가 맞는다면, 이명박 정부는 절망적이다. 공공개혁 교육개혁 규제개혁 등 선진국에선 이미 성공한 개혁정책을 내놓고도 서툴게 칼을 뽑다 제 발을 찌르곤 판을 엎었다. 도덕성이야 기대하지 않았지만 무능하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친박연대한테는 밤마다 수도 서울 한복판이 해방구가 되거나 말거나 오직 친박 복당에만 매달리던 의리의 공주 박근혜가 있었다. 국민에겐 아무도 없다. 결국 믿을 건 나 자신뿐이다. 아버지 아니라 대통령과 목욕탕에 가더라도 물 온도는 내가 확인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이 어떤 결정을 하고 행동하는 데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하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대로 하기(heuristics·발견적 방법)이고 또 하나는 이성을 발휘하기(reasoning)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사람들은 그 머리를 굴리는 수고가 귀찮아 대체로 전자를 따른다는 게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탄 대니얼 카너먼의 이론이다. MBC PD들이 머리 굴려 만든 ‘PD수첩’을 아무 생각 없이 본 시청자들이 퍼뜩, 미국 소 먹으면 죽는다고 믿었던 것이 단적인 예다.

이들에게 인터넷은 지식정보화의 첨단무기 아닌 시간낭비용 흉기가 돼 버렸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며 꼭 눈코 뜰 새 없이 공부만 하다 촛불을 쳐든 듯한 학생들도 가만 보면 인터넷으로 쓰레기정보나 펌질해 대는 시간이 더 많다. 이들을 두고 미국에선 ‘가장 멍청한 세대’라는 개탄을 할 정도다.

‘생각대로 하면 되고’라는 광고 송처럼 생각 없이 사는 이들이 평균인간이라면, 이 속에서 살아남는 전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두 번째 행동모드, 이성을 발휘하는 거다.

물론 잠자는 이성을 불러내 춤추게 만들기가 쉽진 않다. 남다른 의지력과 자제심이 필요하다. 그 유명한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주제도 바로 그거다. 네 살짜리 꼬마들에게 마시멜로를 주고는 어른이 다시 와서 먹으라고 할 때까지 꾹 참는 애들과 홀랑 먹어버리고 마는 애들을 나중에 보니, 잘 참은 쪽이 더 공부 잘하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소위 성공을 했고 반대쪽은 약물 유혹에 더 많이 빠졌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2006년 노벨 경제학상을 탄 에드먼드 펠프스는 성장발전에 있어서 국가정책보다 중요한 게 태도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악정(惡政)에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되는 사람은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실력이든 운이든 심지어 ‘백’이든, 되는 사람은 남보다 더한 의지력과 자제심을 지닌 이성적 사람들이다.

그래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대한민국 건국 이전 그 암울했던 시절,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들은 잘도 잤고 옥수수는 잘도 컸다. 그 아기들과 옥수수가 오늘의 우리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키웠다.

지금 ‘아륀지’ 소리가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더 나은 미래를 원하는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알음알음 그런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굳이 세금으로 교육개혁 안 해도 이들은 괜찮다. 글로벌 세상을 이끌 사람은 이미 부모등골표 글로벌 교육을 받고 있는 이들이다.

문제는 각자도생할 능력도, 이성도 없으면서 ‘미친 정책 반대’ 세력에 휩쓸려 증오심만 키운 사람들이다. 반대나 증오 역시 자유지만 잘 자라는 옥수수만은 막지 말기 바란다. 사회적 약자가 돼 버린 그들을 지원하려면 누군가는 잘돼서 세금도 더 많이 내줘야 한다.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