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시론/정호승]가장 암담할 때 가장 큰 희망을 볼 수 있다

  • 입력 2007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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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에게 새해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견딜 수 없는 절망 가운데 헤매게 될 것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삶 속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눈물과 한숨만 내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해는 또다시 밝았다. 시간은 스스로를 매듭짓지 않고 유유히 흘러갈 뿐이지만 그 시간을 매듭짓고 구분 지을 줄 아는 슬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새해는 희망의 선물이 된다. 대나무가 거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튼튼히 자라는 것은 바로 마디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절망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새해라는 마디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새해 아침을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해 본다. 상쾌하다. 새해의 맑은 햇살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멀리 겨울산 위로 새들이 날아간다. 그루터기만 남은 천수만 무논 위로 새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장엄한 풍경도 보인다. 저 새들도 새해를 맞아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것이다. 날개에 힘이 더 실리고 가슴은 희망으로 한껏 더 부풀 것이다.

새해를 맞이했다고 해서 마냥 상쾌하고 희망으로 벅차오르는 것만은 아니다. 한쪽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지난 한 해 동안 겪은 고통스러웠던 일들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온통 상처뿐이다. “세금폭탄 아직 멀었다”고 누가 소리쳤을 때도, “북한 핵이 남한을 겨냥한 게 아니다”고 여권의 리더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했을 때도, 뇌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모시고 간 응급실에서 “이름을 불렀는데 왜 빨리 대답하지 않았느냐”고 젊은 의사가 화부터 벌컥 내었을 때도 나는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말에는 어른이 해야 할 말, 아이가 해야 할 말이 따로 있다. ‘말은 곧 인격이다’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 무시되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막말은 막말일 뿐이다. 오죽하면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고 하겠는가. 더구나 대통령이 ‘난데없이 굴러온 놈’ 등 자기 비하의 말을 한다는 것은 언어라는 무기로 국민을 날카롭게 공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다면 나라엔 국격이 있다. 인격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국한되지만 국격은 그렇지 않다. 국격은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숭고한 의무다. 사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언어는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

올해도 우리에겐 어려운 국가적 난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대선과 북한 핵과 자유무역협정(FTA)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대선의 경우,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권의 대결이 치열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단 한 표를 더 얻기 위해 선심정책을 쏟아놓고 흑색선전을 퍼뜨릴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진실을 위해 우리 모두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아닐까. 햇볕이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우듯 진실에 초점을 모아 찬란한 진실의 불꽃을 피워 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진실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다.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일들이 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올바르게 들여다볼 수 있는 진실의 눈이다. 국가적 현안에 대해 국민의 관심과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이때 이웃집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하거나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좀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스스로 깨어나 두려워하지 말고 두 눈을 바로 떠야 한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시대를 살아서는 안 된다.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는 자는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바른길을 안내할 수 있는, 오직 제대로 눈을 뜨고 있는 자일 뿐이다.

다시 가슴을 펴고 새해 아침을 향해 심호흡을 해 본다. 아침 햇살이 상처 많은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가장 암담할 때에 가장 큰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우리가 그동안 경험한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얼음장 밑에 사는 겨울의 물고기도 언젠가는 얼음이 풀리고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신도 간혹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고 한다. 2007년 새해에는 우리의 운명 앞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신이 없기를 바라며 무릎을 꿇고 ‘새해의 기도’라는 나의 시 한 편을 올린다.

주여/올해도 저희를 고통의 방법으로 사랑해 주세요/저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고통의 방법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해 주세요/그렇지만 올해도 저희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마소서.

주여/올해도 저희를 쓰러뜨려 주세요/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저희를 쓰러뜨리신다는 것 이제 아오니/올해도 저희를 거침없이 쓰러뜨리셔서/다시 힘차게 일어나 진실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게 해 주소서.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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