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시론/김태효]대북정책,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라

  • 입력 2006년 10월 9일 19시 21분


코멘트
그렇게 놀랄 일인가. 북한의 핵실험이 이렇게까지 전격적으로 단행될 줄 미처 예상치 못했다면 그간 북한 정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3일 있었던 북한의 핵실험 예고는 국제사회의 시선을 집중시켜 ‘거사’의 정치적 효과를 제고하고 세계의 동향을 탐색하는 뜻이었을 뿐 이미 하기로 마음먹은 핵 국가 선포의 의식(儀式)은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동당 총비서 추대 9주년을 하루 넘기고 노동당 창건 61주년을 하루 앞둔 징검다리 휴일인 10월 9일을 택한 점은 핵실험을 통한 핵 국가로의 등극이 북한 내부적으로도 크나큰 상징성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정책 실패 반성없는 정부

한반도의 앞날과 국제정세는 어디로 갈 것이며 우리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더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북한 정권의 대외 협상용 카드로 치부하지 말자. 김 위원장과 군부의 마음속엔 애초에 협상이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북한이 핵 능력을 실제로 과시한 상황에서는 다른 국가들이 북한에 제시할 협상안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은 앞으로 자신을 어엿한 핵 국가로 인정한 채 필요한 얘기가 있으면 주권국가끼리 동등하게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논의하자는 논리를 펼 것이다. 군사 문제는 자신의 핵 폐기가 아닌 한미동맹 와해를 겨냥한 상호 군축으로 몰고 가려 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엔 차원의 각종 조치는 강도 높은 성토와 경고의 메시지를 포함하겠으나, 대북 군사조치를 시사하는 유엔헌장 7장을 당장 동원하기는 힘들 것이다. 북한이 소비하는 모든 석유와 상당한 식량을 공급해 온 중국이 갑자기 이들 지원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에 대해 화가 나고 실망한 것과 북한 체제를 버리는 문제는 서로 차원이 다르며,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도 북한 정권을 보호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격앙된 대응은 북한 경제에 타격을 주기보다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경계심을 살 가능성이 더 크다.

한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어제 발표한 성명을 보면, 북한 핵 위협의 직접적인 당사자이자 최대의 잠재적 피해국가로서의 분노와 북한에 대한 질책이 엿보인다. 그러나 현 사태를 예방하지 못하고 북한이 주도하는 남북대화에 끌려 다니기만 한 정부로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고쳐 가겠다는 반성과 각오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여야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조율된 조치를 취하겠다”는 인식은 작금의 안보비상 사태에 비추어 안이하기만 하다.

이러한 모든 정황을 짐작한 김 위원장이라면 승부수를 쉽사리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지속해 온 고난의 행군을 밀어붙여 핵 국가의 지위만 기정사실화하면 결국 제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한반도의 새로운 현실을 묵인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행보가 사면초가의 위기를 돌파하게 될지, 아니면 자신의 정권의 몰락을 오히려 재촉하는 악수가 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우리는 핵 확산 방지 문제가 지구촌의 최대 화두로 떠올라 있는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북한을 제2의 파키스탄으로 인정하려 할 강대국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6·25전쟁을 겪고 잿더미에서 나라를 일으킨 이래 최대의 갈림길에 봉착했다. 북한의 핵 도발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이성적인 대북정책은 고사하고 자유민주 통일의 토대를 다지는 외교 네트워크의 구축도 어려워진다. 정부는 모든 대북사업을 전면 중단하고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여론에 묻는 척하며 국론을 분열시키지 말고 한국이 보유한 북한에 대한 경제, 외교적 지렛대를 이제부터라도 행사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안전을 지키고 결국은 헐벗은 북한 주민을 구하는 길이다. 북한이 핵무장 했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우국충정은 도리어 한국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자충수임을 주지시켜야 한다.

韓美동맹 재정비 계기로

어디까지나 재래식 무기의 사용을 전제로 한 우리의 국방개혁 2020은 이미 무용지물이 된 마당에 아직도 전시작전통제권의 단독 행사를 당연히 추진해야 할 사안이라고 강변한다면 이는 국가안보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은 정신 나간 소리가 될 것이다. 20일 개최될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는 한미연합사의 해체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북 핵 억지 군사태세를 구축하기 위한 동맹정비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미국의 이해가 우리의 이해와 다르다면 설득하고 관철해야 한다. 동맹끼리 추구하는 가치와 전략 목표가 같다면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다.

대북 포용정책이 겨냥했던 통일의 느림보 시계는 어제를 기해 멎었고, 지금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른 격동의 시계가 막 작동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시계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삼켜 버릴지, 아니면 다시 시계의 초침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지는 지도자들의 냉정한 판단과 위기관리 능력에 달렸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