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윤석열, ‘좀스러운 남탓 정권’ 끝낼 그릇 될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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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정권 탓 결정판 “부동산 적폐청산”… 지지층 결집 위한 프레임 전환 시도
윤석열, 친문 재집권 막을 대안 떠올랐지만
법치·공정이 대선 핵심 시대정신 될지는 미지수
反文戰士 넘어 국가비전과 공감·소통 능력 보여야

이기홍 대기자
이기홍 대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LH사태에 대해 ‘부동산 적폐’ 프레임을 들고나온 날 ‘우공지곡’이란 고사성어가 생각났지만 칼럼에 인용할지를 놓고 한참 망설였다.

제나라 환공이 사냥을 하다가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한 노인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우공지곡(愚公之谷)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의 골짜기란 뜻이다. 그 노인이 자신의 암소가 낳은 송아지를 팔아 망아지를 샀는데 청년들이 “소는 망아지를 낳을 수 없으니 훔친 것이 분명하다”며 뺏어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노인이 멍청하다며 우공이라 불렀다.

환공이 궁에 돌아와 신하들에게 우스운 이야기라며 그 일을 전하니 재상 관중(管仲)이 무릎을 꿇고 통렬히 사죄했다. “나라에 법률과 제도가 엄격히 살아 있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국정 책임자인 자신의 과오라고 사죄한 것이다.

옛 현인(賢人)이나 성군(聖君)의 고사를 살펴보는 것은 현 위정자의 선택이나 결정을 놓고 과연 더 올바른 길은 없었는지, 어떤 것이 더 이치와 상식에 맞는지 가늠자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자기 정권에서 벌어진 공직부패마저 적폐 탓으로 돌리는 행태는 옳고 그름이나 이치를 논할 수준 자체가 안 된다. 그래서 고사 인용이 망설여졌던 것이다.

집권세력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건국 이래 그 어떤 부정부패, 어떤 대형 참사라고 적폐(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그런 논리면 장관들이 무더기로 뇌물을 받아도 ‘국민학교’ 시대 도덕·윤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옛 정권 탓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추미애, 조국 등은 한술 더 떠 LH사태가 윤석열과 검찰 책임이라고 한다. 전염병이 번지니 병원장과 의사들 탓을 하는 격이다.

LH사태는 국책사업 시행 주체들이 정책정보를 이용해 사익을 챙긴 공직부패 문제인데 이를 어느 시절에나 만연한 일반 부동산 투기 문제로 전환시켜 버렸다. 행정부 잘못을 사회 전체와 과거 세대까지 포함한 모두의 책임문제로 돌리고, 자신들은 ‘유책자(有責者)’에서 ‘조사관’ ‘척결자’로 슬그머니 역할을 변신한다.

물론 억지임을 스스로 알 것이다. 문 대통령이 적폐 선언 다음 날 뒤늦게 사과문을 읽은 것도 아무래도 논리가 궁색하다는 진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레임 조작은 멈추지 않는다. 외부에 공적(公敵)을 만들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정신승리용’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상식과 이치에 벗어나고 민망한 일이어도 이기는 게 정의라는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헌정사에서 경험해본 적 없는 편 가르기와 포퓰리즘 정책을 총동원할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스텝이 꼬일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LH사태에서 벗어나려면 대대적인 수사 의지를 과시해야 하는데, 사냥개(검찰)는 이미 삶아 먹겠다며 털을 다 뽑아 버렸다. 검수완박의 자승자박이다.

뱉어놓은 말과 현실의 괴리는 갈수록 커진다. 미중 균형자 역할을 외쳐왔지만, 현실은 미국의 대중 압박 전선 참여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문 정권도 안다. 그러다 보니 한미 회담이 끝나면 양측 발표에 차이가 나는 현상이 심해진다. 점점 더 다양한 분야에서 괴리 현상이 심해질 것이다.

보수 유권자들에게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읽힌다. 최근 만난 지인들은 강경 보수성향들인데 한결같이 앞으로 선거에선 중도성향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작년 이맘때는 그런 정치인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돌렸던 이들이다. 이번 보선에서 만약 국민의힘 후보로 단일화돼 이기면 보수의 힘만으로도 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들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내 생각과 일치하는 후보보다 상대의 재집권을 막는 데 필요한 후보를 앞세우는 전략적 선택의 보편화는, 공동체 위기의식이 반드시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절박한 권력의지로 점화되는 티핑 포인트를 넘어섰음을 시사한다.

그동안은 그런 보수층의 염원을 담아낼 그릇이 부재했는데 윤석열이라는 가능성이 나타났다.

하지만 법치, 공정, 권력비리 척결 등의 가치가 내년 대선에서도 시대정신의 핵심이 될지는 미지수다. 추미애 조국 같은 분노유발재(材)들이 계속 설쳐주지 않으면 그저 안티테제로 축소될 수도 있다. 상대는 레닌과 마오쩌둥에 심취했던 ‘평생 직업이 전술과 선거’인 사람들이다.

문 정권의 리더십은 좀스러움을 넘어서는 후안무치와 이중잣대, 분열통치 같은 특징을 드러냈다. 반면교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반(反)문재인 만으로는 부족하다.

윤석열의 성패는 반문전사(反文戰士)를 넘어서는 비전과 대안에 달렸다. 국가경쟁력 강화, 지속가능한 미래를 약속할 정책 대안, 약자·청년·소외계층과의 소통과 공감능력에서 분명한 잠재력을 보여야 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정치#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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