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안혜진과 최익제, 그리고 세터라는 자리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10월 24일 14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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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칼텍스 안혜진. 사진제공|KOVO
GS칼텍스 안혜진. 사진제공|KOVO
배구의 세터는 야구의 포수, 미식축구의 쿼터백처럼 특수포지션이다. 모든 플레이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팀의 영업비밀도 가장 많이 안다. 그래서 다른 팀으로 잘 보내주지도 않는다. 경기 때는 감독을 대신해 동료들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의 역할을 한다. 리더십과 어느 정도의 연차도 필요하다.

데뷔하자마자 주전을 차지하는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바닥에서 시작한다. 포지션 특성상 경험도 필요하다. 육성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실패를 통해 계속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마침내 어느 순간 주전자리를 차지한다.

성인배구 21년차의 이효희(도로공사)도 5년여의 긴 시간을 웜업존에서 준비한 끝에야 주전세터가 됐다. 이숙자 KBS해설위원도 웜업존에서 기다리던 오랜 시간이 있었기에 2012런던올림픽 4강 신화를 쓸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세터에게 기다림과 준비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 세터와 공격수는 반복된 훈련을 통해 함께 몸의 기억을 만든다

GS칼텍스는 도드람 2018~2019 V리그 개막을 코앞에 두고 사달이 났다. 주전세터로 한창 시즌을 준비하던 이고은의 오른쪽 무릎에 탈이 생겼다. FA를 앞두고 의욕이 한창이던 이고은은 수술을 받았다.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선수는 물론 준비를 다 마친 팀에도 시련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팀플레이의 70~80% 이상을 주전세터와 맞춰온 단계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배구의 특성이다. 공격수는 공을 보고 점프하지 않는다. 세터가 어떤 스피드로 어떤 위치에 공을 보내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먼저 네트 위로 달려든다. 아주 짧은 순간에 공격수는 예측한 공이 오면 책임감을 가지고 때리면 된다.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주전세터와 공격수는 뛰어 들어가는 타이밍과 패스된 공의 스피드 그리고 높이에 맞추는 훈련을 반복해서 한다. 코트의 여러 명이 함께 몸의 기억을 통해 맞춰온 호흡이기에 한 곳이 어긋나면 전체가 흐트러진다.

그래서 주전세터가 다치면 감독들은 패닉에 빠진다. 지금까지의 훈련을 백지로 돌려놓고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23일 현대건설과의 개막전에서 제2세터 안혜진을 주전으로 출전시킨 차상현 감독도 그랬다.

● 20살 프로 3년차 안혜진에게 찾아온 기회와 경험

프로 3년차 안혜진은 선배 이고은의 부상소식을 듣자 가장 먼저 “막막했다”고 털어놓았다. 누군가의 부상은 내게 출전기회가 생긴다는 말이지만 부담감에 어린 선수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가지기 쉽다. 차상현 감독도 이를 알기에 공격수들에게 신신당부했다. “나쁜 공이 올 때도 많을텐데 잘 처리해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달라. 선수들끼리 뭉쳐서 가자”고 했다.

다행히 안혜진은 대범했다. AVC컵 대회에서 주전세터로 국제대회 경험을 쌓은 덕도 봤다. 연습경기 때도 어렵고 복잡한 공격은 못하지만 최대한 공격수의 입맛에 맞게 공을 올려주려고 노력했다. 하면서 점차 자신감도 생겼다. 첫 실전에서 “천천히 하자”를 몇 번이고 속으로 외치며 마인드컨트롤도 했다. 간혹 공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도 갔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제발, 제발” 하면서 기도했다. 다행히 이소영 강소휘 등이 싫은 기색 없이 때려줬다. 점수가 모였고 이겼다. 그렇게 세터는 경험을 쌓아가고 만들어진다.

KB손해보험 최익제. 사진제공|KOVO
KB손해보험 최익제. 사진제공|KOVO

● 19살 프로 2년차 최익제와 큰삼촌뻘 선배들이 만드는 신뢰

KB손해보험은 더 황당한 꼴을 당했다. 16일 대한항공과의 시즌 홈개막전에서 주전세터 황택의와 2번째 세터 양준식이 부상을 당했다. 정신없이 3번째 세터 최익제가 투입됐다. 프로 2년차 19살의 어린선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권순찬 감독은 “마음 편히 하라”는 말밖에 해주지 못했다.

21일 OK저축은행과의 경기에서 최익제는 선발로 출전했다. 고교시절 기량을 인정받아온 선수였지만 성인배구 무대의 데뷔전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다행히 첫 세트를 따냈다. 최익제는 무려 4개의 서브에이스를 기록했다. 외국인선수 알렉스도 없는 상황에서 강영준 등 베테랑들도 힘을 냈다. 최익제가 용감하게 올려주는 속공을 처리한 이선규와는 무려 18살 차였다. 큰삼촌뻘들을 리드해 가면서 한창 기세를 올렸지만 2세트부터 한계가 조금씩 보였다. 패스 특성을 간파한 상대팀의 블로킹이 탄탄해졌다. 그때마다 양준식이 투입됐다. 결국 온전히 한 경기를 소화하지 못한 최익제였지만 희망은 봤다. 선배들은 공격이 실패한 뒤에도 연신 그를 격려했다. 그렇게 세터와 공격수는 서로 의 신뢰를 쌓아가면서 성장한다.

대한항공의 한선수도 2007~2008년 자신의 루키시즌에 주전 선배 김영석의 발목부상으로 기회를 잡았고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물론 그때까지 잘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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