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국가 R&D 예산권 다툼을 보는 안타까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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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전의 앞면도 뒷면도 아닌, 그저 모서리에 서 있을 뿐이다.―파괴적 혁신(뤼크 페리·글항아리·2016년)》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뤼크 페리는 경제와 과학기술은 물론이고 예술, 문화, 체제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위한 혁신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키우는 일종의 파괴가 일어난다는 데 주목했다. 혁신에 저항하는 비관주의와 반대 논리를 뒤집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혁신의 어두운 이면을 면밀히 짚어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차관급 조직인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했다. 20조 원에 이르는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의 예산 권한을 기획재정부에서 과기혁신본부로 이관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재부 고유 권한이었던 예비타당성 조사와 지출한도 설정 권한까지 넘긴다는 내용이다. 도전적인 성격이 강하고 진보 속도가 빠른 R&D의 특수성을 고려해 예산 심의에서 경제성에만 치중하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국가재정법 개정안 통과는 아직 요원하다. 그동안 강하게 반발해 왔던 기재부와의 합의는 국무조정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이뤄졌다. 이번엔 국회가 발목을 잡고 있다. 야당 의원들의 반대 논리는 ‘선수가 스스로 심판하는 격’ ‘과기정통부는 예산 전문가가 아니다’ ‘경제성 평가를 간과할 수 있다’ ‘타 부처와의 형평성에 어긋난다’ 등이다. 기재부와의 합의 과정에서도 이미 나왔던 얘기가 여의도로 옮겨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컨트롤타워’가 되겠다던 과기혁신본부는 이 논리를 뒤집을 만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인상이다. 대통령 임기 내에 2배로 확대하겠다던 기초 연구비 예산도 국회 예산 조정 과정에서 당초 예산안보다 800억 원 삭감됐다. 벌써부터 과학기술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연구 환경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국가의 한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다.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부탁하는 것만으로 가능할 리 없다. 과기혁신본부는 예산 권한 이관 이후에 우려되는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파악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동전의 앞면만을 내세워서는 설득하기 어렵다. 닫힌 귀에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송경은 동아사이언스 기자 kyungeun@donga.com
#파괴적 혁신#뤼크 페리#책#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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